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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 100주년으로 뉴스마다 여러 가지 보도가 되는데 그 후손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너무 한가지 목적으로 포장을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들 안중생은 후일 이토 히로부미 사당에 참회의 절을 하고 그 아들에게 울며 사죄하고 양자를 자청했다고 합니다. 그 대라고 약국을 차리고 자식은 미국 유학을 가고 그런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 김구선생은 안중생의 암살을 지시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실행은 되지 않았지만 참 비극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찾아보는 와중에 안중근의사의 큰딸의 수기가 보여서 인용합니다. 기가 봐서 마찬가지로 제가 있었던 니다.

 

아들의 변절에는 집에 먹을게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는 변절이니 친일이니 하는 비난은 아래 수기를 봐서라도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안중근의사의 의거와 그 후손이야기가 포장이 아니고 사실대로 솔직하게 다뤄졌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아래 수기는 1956년 실화라는 잡지 4월호에 실렸던 큰딸의 글이라고 합니다.

 

거사 후에 우리 가족이 더듬어온 길

세상 떠나신 선친에 대해서 여러분이 쓰신 글들을 많이 보았습니다만 저 자신이 붓을 들기는 이것이 처음입니다. 이렇게 청을 받고 붓을 드니 하고 싶은 말도 많고 머리 위에 떠오르는 지난 일도 많습니다만 무엇으로부터 말을 시작해야 좋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생각나는 대로 대충 적어보기로 하겠습니다. 선친이 돌아가신 것은 지금으로부터 46년 전 326일이었습니다.

그때 제 나이 여덟 살이고 보니 큰 기억이라고는 있을 수 없었습니다만 자라면서 조모님을 비롯하여 여러 선생님으로부터 말씀을 들었습니다. 원래 저의 집 고향은 황해도였습니다만 조부모님 때부터 진남포(鎭南浦)에서 살았습니다. 선친께서는 일찍이 집을 떠나 망명길에 나섰고 숙부 한 분은 서울법정학교에 다녔고 한 분은 진남포에서 일찍이 선친이 창설한 학교 교원으로 있었습니다.

이리하여 어머님과 어린 동생은 조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만 선친께서는 의거하신 해에 노령(露領·러시아 영토) '버그라니스'에 살림을 장만했으니 온 집안 식구더러 오시라고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그러나 살림살이로 보든지 식구로 보든지 솔가할 수는 없었지요. 그래서 조모님 말씀이 비록 망명길을 떠나기는 했으나 가족이 그리울 것이며 그날그날이 적적할 테니 저의 어머님과 어린애들만이라도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장녀로 태어나 조모님의 지극한 귀여움을 받아오던 저까지 보내면 쓸쓸하셔서 견딜 수 없다고 저만은 조모님께 남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조모님의 말씀대로 어머니는 어린 동생을 데리고 길을 떠났습니다. 딱딱한 사회적 환경과 딱딱한 집안 분위기에서 자란 어머니는 이때 처음으로 기차를 타시게 되었고 처음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던 장옷을 벗고 구두를 신었습니다. 이와 같이 여장(旅裝)을 꾸미시고 집을 떠나 기차가 장춘(長春·당시 新京)에 이르렀을 때 정거장에는 총을 메고 칼을 찬 헌병이나 경찰을 비롯하여 유달리 일반 사람이 흥성대고 있었답니다.

그래서 처음 길 떠난 어머니도 의아스럽게 생각하였지만 주위 사람들도 저마다 의아스럽게 보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이등박문(伊謄搏文)의 시체를 실은 기차가 마주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와 같은 중대한 사건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하얼빈에 도착하여 선친이 연락하신 대로 그곳 김성백(金聖佰)씨 집을 찾아갔습니다. 한데 김성백씨를 비롯하여 집안사람들이 조금도 반가워하는 기색이 없을뿐더러 거의 무표정하게 아무런 말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는 이라고는 한 분도 없는 하얼빈이라 어머니는 그래도 그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그곳에 선친하고 함께 계시던 모씨가 들어오더니 선친께서 이등박문을 죽였다는 소식을 전함으로서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그분 말씀이 곧 일본 경찰이 잡으러 올 텐데 절대로 안중근의 아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주셨습니다. 그분 말대로 얼마 후 말소리 요란스럽게 일본 경찰이 와서는 어머니와 어린것을 잡아갔습니다.

어머니로서는 객지에 나선 것도 이것이 처음이요 경찰서에 가보기도 처음이었습니다. 일본 경찰은 선친과 ×××씨의 사진을 내보이면서 잘 알지 않느냐 하고 묻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순간 어머니는 선친의 사진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한쪽에 밀어내고 모씨는 오빠 되는 분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이처럼 고집해도 이미 알아낸 일본 경찰은 "안중근의 아내인 줄 알고 있는데 왜 거짓말을 하는 거야" 하면서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끝내 부인하자 그들은 어머니와 어린 것을 유치장에 가두었습니다.

평소 어떻게 생겼는지 생각조차 해본 일이 없는 어두컴컴한 유치장에서 어머니는 어린 동생보고 울라고 시켰습니다. 아마 그렇게 하면 시끄러워서라도 곧 내보내리라 믿었는지 모르지요. 그것은 어쨌든 어린 동생이 자꾸 울기만 하자 일본 경찰은 나오라고 하면서 다시 조사를 계속하는데 그때 어머니는 어린 동생보고 이젠 울지 말라고 하니 "엄마, 아까는 울라고 하더니 왜 이젠 울지 말라고 해요" 이렇게 말하였고 이것을 들은 일본 경찰은 또다시 욕설을 퍼부었답니다. 결국 어머니는 3일 동안 유치장 생활을 하시다가 나왔습니다. 어머니의 외로웠을 심정은 누구든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요. 그 후 선친이 의거하신 소식이 널리 알려지자 이곳저곳에 흩어졌던 여러분들이 하얼빈에 모이기 시작했고 그분들의 주선으로 선친이 마련하신 버그라니스에서 고독한 살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李王의 밀사라고 모계(謀計)하는 일본 경찰

한편 일본 경찰은 진남포 저희 집을 수색하고 서울에서 공부하시는 숙부도 조사하고 야단이었지요. 일이 이렇게 되니 저의 집안사람들이 국내에서 마음 편히 살수는 없는지라 조모님, 숙부님 모두 조국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낮에는 여관에 묵고 밤이면 걸어서 함경도-만주로 해서 노령인 버그라니스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다시 동청철도(東淸鐵道) 연변에 있는 목릉에 집을 옮겼습니다. 그 후 한 사람 두 사람 숙부님의 가족도 한곳에 모이게 되었고 그리하여 그곳에서 우리 집안사람들이 살게 되었는데 그곳을 지나오고 지나가는 혁명가 분들은 꼭 들러서 위로해주곤 했습니다.

한편 선친의 의거에 대해서 말하면 일찍이 의용군(義勇軍)을 조직하고 두만강에서 일본 사람과 접전(接戰)하시던 선친은 다시 해삼위(海蔘威·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지들과 함께 의거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등박문이 온다는 소식을 듣자 구체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동지의 한 분인 우덕순(禹德順)씨는 본래 은방을 한 경험이 있는지라 총알도 몸에 박히면 한층 괴로움을 당하도록 모가 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하얼빈까지의 지리를 따져 우덕순씨, 유동하(柳東夏)씨 그리고 선친 세 분이 세 곳에 대기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우덕순씨도 그와 같은 의거의 기회를 만나지 못했고 유동하씨도 그러했습니다. 그리하여 마지막 기회인 하얼빈에서 선친이 이등을 죽였지요.

선친은 이등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와 같이 동지들과 계획을 세운 다음 소련에서 자라 소련말 중국말에 능통한 유동하씨와 함께 하얼빈에 도착해서는 위에서 말한 바 있는 김성백씨 집에 투숙하였습니다. 그리하여 20일 가까이 대기하고 계시다가 마침 1026! 그날이 왔습니다. 이등을 맞이하기 위해서 소련의 고관들도 많이 나왔고 경비도 준엄했습니다만 선친께서는 용의주도하게 이등 가까이까지 뚫고 들어가셨습니다. 그리하여 총을 뽑기 시작했는데 이에 앞서 해삼위에서 동지들과 약속하기를 이등에게는 총 세 발을 발사할 것, 그렇게 함으로서 절명(絶命)을 보장할 수 있으며 나머지 총탄도 주의해서 발사하되 소련 사람이 맞을 경우 국제적인 문제도 있으니 주위에 있는 일본 고관에게 발사하기로 했답니다.

그래서 선친께서 이등을 향해 일 발을 발사했으나 워낙 군악(軍樂)소리가 요란스러웠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은 총소리를 듣지 못했고 이 발을 발사하자 그때 비로소 주위 사람들이 총소리를 알아듣기는 했으나 순간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답니다. 삼 발을 발사하자 이등은 땅에 쓰러지고 선친은 계속해서 주위에 있는 일본 고관들에게 난사(亂射)하여 팔에 맞은 놈, 머리가 깨지는 놈이 속출했답니다. 이제 뜻했던 바 일에 성공하신 선친은 권총을 내던지고는 바로 그 장소에서 "대한민국 만세"를 힘 있게 외쳤지요. 이리하여 일본 경찰은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는 선친을 마차에 실어 여순구(旅順口)에 이송하였습니다.

취조가 시작되었으나 선친께서 자기의 일거일동을 명백히 하는지라 고문할 필요도 없었고 길게 조사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의 모계(謀計)를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선친더러 목숨을 살려줄 테니 공판정에서 이왕(李王)의 명을 받고 이등을 죽였다고 진술할 것을 강요한 것입니다. 이때 선친께서는 "목숨을 아낄 내가 아니요, 그렇게 목숨을 아끼는 나라면 이런 중대한 일을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천부당만부당한 말을 그만두고 빨리 사형해 달라고 했습니다. 선친의 태도가 그와 같이 확고하니 일본 경찰도 그와 같은 그들의 계획을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
나라를 찾거든 고국에 묻어달라!"고 유언

그리고 일본 경찰도 선친께 대해서는 극진한 대우로서 음식은 요구하는 대로 제공했답니다. 의거하신 1026일에서 사형당하시던 다음 해 326일까지의 만 5개월 동안 추운 형무소 생활을 계속하신 선친의 고생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겠지요.

선친께서 사형언도를 받자 그때 서울에 와 있던 프랑스인 홍() 신부님은 선친의 마지막 길에 '연미사'를 올리고 유언을 듣기 위해서 여순구로 왔습니다. 그러나 정식으로 주교(主敎)의 승낙을 얻을 수 없는 일이어서 홍 신부님은 주교에게 비밀에 부치고 개인적으로 그것을 행했기 때문에 나중에 신부 자격을 잃게 되었지요. 즉 홍 신부님은 선친을 위해서 희생된 것인데 그 후 홍 신부님은 비록 신부의 자격은 잃었어도 고국에 가서 그대로 신부의 복장을 하시고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계속했답니다.

사형을 집행하기 전에 홍 신부님이 연미사를 올리고 마지막 유언을 들을 때에는 저의 숙부 두 분도 참석하였습니다. 선친의 유언은 간단했지요. "나라를 찾거든 나의 시체를 고국에 묻어달라"라는 한마디였습니다. 그들은 326일 오전 10시 정각에 정기장치로 사형을 집행했고 그때 숙부님 두 분이 일본 경찰에게 시체를 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만 일본 경찰은 이를 거절하면서 숙부님을 밖으로 떠밀어냈습니다.

숙부님 두 분은 워낙 어리신 때라 눈물이 앞을 가로막아 그대로 여관에 돌아가 밤새 붙잡고 울기만 했답니다. 아침에 배달되는 신문을 보고 선친을 ××에 매장한 것을 알게 되었지요. 한편 선친의 의거가 있기 전에 제정 러시아에서는 교포 7만명을 노령으로부터 퇴거(退去)하도록 명령을 내린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친의 의거가 있자 한국에 이와 같이 훌륭한 분도 있느냐고 하면서 퇴거명령을 철회했을 뿐만 아니라 좋은 땅을 제공하기까지 했답니다. 또한 저희들을 감격하게 한 것은 해마다 선친이 돌아가신 327일이면 중국 사람을 비롯한 외국 사람들까지도 그 묘지를 찾아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일본 사람들도 그날이면 분향을 했습니다. 얼마 전 향항(香港.홍콩)을 거쳐 중국에서 돌아 온 사람이 전하는바 지금도 그 묘지를 찾아주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8
·15 해방이 되면서 선친의 유언대로 고국에 모시려고 했습니다만 국제정세가 미료했던 관계로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셋째 숙부님은 일찍이 중국에서 세상을 떠나시고 둘째 숙부님은 "형님이 그렇게 유언하셨는데 어찌 나만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느냐"라고 하시면서 고국에 돌아올 것을 거부하고 국제정세가 좋아지면 선친의 유언대로 선친을 모시고 고국에 돌아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 공산당이 정권을 잡게 되었고 숙부님은 상해와 대만을 오고가고 하시다가 중국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편 제가 고국으로 돌아온 것은 해방된 다음해 1111일이었습니다. 이렇게 늦게 돌아오게 된 것은 물론 선친을 모셔야 한다는 데도 이유가 있었지만 다른 돌발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해방 당시 중국 상해에 우리 교포 몇 천명이 살고 있었는데 주인(남편)이 한교민단(韓僑民團) 단장으로서 일을 보아오다가 그해 124일 나쁜 사람들로부터 저격을 당해 세상을 떠나게 된 불행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주인의 유골을 모시고 돌아와야 하였기 때문에 그처럼 늦게 돌아오게 되었지요.

두 딸과 함께 고국에 돌아온 저는 당장 의지하고 찾아갈 곳이 없었습니다. 오직 있다면 제가 어릴 때 약 4년간 불란서 '까이리' 수녀님과 지낸 일이 있어 그 계통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명동 성모병원으로 갔더니 마침 정()의례시나 수녀님이 저를 알아보고 고맙게 대해주셨습니다. 수녀님은 추운 날씨라 제 손을 잡고 자기 입김을 불어주시면서 방으로 안내하였습니다. 그곳에 우선 짐을 맡겨두었지요. 상해에 있을 때 듣기에 입을 옷이며 가구가 귀하다고 하기에 중요한 것만 꾸려 가족 가방 다섯 개와 보통 짐 다섯 개로 만들어 수녀님 댁에 보관시킨 거지요.

조국을 찾은 첫날에 당한 지능적 사기!

한데 고국에 돌아오자 또다시 예기치 않았던 불행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상해를 떠날 때 저와 딸 둘로 여자들만이라 이웃사람의 소개로 어떤 청년과 같이 오게 되었습니다. 그 청년은 짐을 꾸릴 때에도 거들어준다고 하면서 어느 속에 무엇이 들고 어느 속에는 어떠한 것이 들어 있다는 것을 저만큼 알고 있었지요. 그리하여 함께 돌아와 성모병원까지도 같이 왔었고 저는 짐을 그곳에 맡겨두고는 아는 사람들을 찾기 위해서 밖으로 나왔지요.

다음 날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 수녀님을 찾고 그 뜻을 말했더니 짐을 둔 방문을 열어주셨습니다. 한데 가방 다섯 개가 눈에 띄지 않기에 제 생각으로는 수녀님께서도 가방 다섯 개만은 중요한 것이 들었으리라 믿고 자기 방에다 따로 보관했으리라 믿었지요. 그래서 "수녀님, 가방은 방에다 보관하셨군요"라고 한마디 하자 순간 수녀님은 매우 당황한 표정이 되어 잠시 말이 없었습니다. 다음 순간 말씀하기를 전날 저와 그 청년이 나간 지 한 시간 후 청년은 다시 돌아와서 지금 호텔 방을 하나 얻고 당분간 그곳에 투숙하기로 되었기 때문에 제가 시켜서 왔다고 하면서 가방 다섯 개를 갖고 갔다는 것입니다.

실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수중에 돈은 없고 이제 입을 옷까지 잃었으니 앞으로 어떻게 하나 생각해봐야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 청년은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한 일이라 다시 찾을 수도 없으리라 단념하고 우리 세 모녀는 막연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지요. 한데 고마웠던 것은 이() 신부님이 신학교 기숙사 방 하나를 빌려주셨습니다. 비록 다다미방이기는 했으나 의지할 곳 없는 우리 모녀에는 사랑스러운 보금자리였지요.

이제 방은 얻었으나 먹을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정의례시나 수녀님의 소개로 금강전구주식회사 사장인 박정근(朴定根)씨를 방문하고 그곳에서 생산되는 전구로 장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이와 같이 장사하기로 이야기는 됐습니다만 우선 전구를 100개 받아오려면 낡은 전구 100개를 가지고 가야 하는데 제 주위에서는 그것을 구할 도리가 없었지요.

이것 역시 교회 안에서 모아가지고 전구를 받아서 팔기 시작했습니다. 이집 저집, 이 가게 저 가게 찾아다녔지만 그리 잘 팔리는 장사도 못될뿐더러 아는 사람을 만날까봐 퍽 어색했습니다. 그러나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다소 익숙해지기도 했고 밥 세끼를 먹을 만한 최소 한도의 수입은 있었습니다. 전구 하나를 팔면 20전이 이익으로 남았고 그리하여 하루 이삼백원 수입으로 세 식구는 그날그날을 보냈지요. 그러나 전구가 제대로 생산되면 100개건 200개건 받을 수 있었으나 생산이 제대로 되지 못할 때에는 최소한의 수입마저 끊어지는 날도 있었습니다. 더구나 전구를 잘못 받아 오면 몇 개씩 손해를 보게 되는지라 공장에서 하나하나 시험을 해가면서 100 200개를 받는 수고는 그때가 추운 겨울이라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최소한의 생활도 다시 풍파를 만나게 되었으니, 그것은 학교에서 기숙사를 수리하여 학교에서 써야 하는지라 저와 같이 방을 얻어 쓰고 있던 몇 사람은 부득이 방을 비워야 했습니다. 이와 같이 방은 꼭 비워드려야 했으나 우리 세 모녀는 당장에 갈 곳이 없었지요. 그래서 저는 며칠을 두고 생각했답니다. 누구를 찾아가면 꼭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하고 이 사람 저 사람을 머리 위에 그려보면서 하나하나 판단을 내렸지요.

그러던 끝에 선친을 잘 아시고 저와도 중국에서 학교 시절 가까이 지냈던 주모씨를 방문하고 사정 이야기를 했더니 그분이 그때 돈으로 적지 않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선 안국동에 방 하나를 얻고 나머지 돈을 밑천으로 해서 우리 모녀의 살림을 확립하기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김모씨의 말이 된장, 간장을 받아서 군부에 납품하면 생활은 유지할 수 있다기에 그 사람 말대로 안국동에 '안생공사(安生公司)'라는 간판을 걸고 그 사람과 함께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또다시 사기당하는 온정의 거금


그것이 1947 7월이었습니다. 한데 그 김모씨는 장사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고국 사정에 어두운 저를 속이고 장사밑천으로 고스란히 사복을 채웠지요. 속았다는 괘씸한 생각은 물론이거니와 주씨로부터 얻은 그 적지 않은 돈을 이렇게 헛되게 없애버린 미안스러운 생각이 앞서 몹시 괴로웠습니다. 이제 또다시 생활이 곤란한 데다가 방세도 다시 내야 할 텐데 제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다시 어는 누구를 찾아 동정을 바랄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울히 지내는 어느 날 저의 사정을 잘 아는 신모씨가 퍽 동정하시면서 8군단에서 지은 후생주택 하나를 주선하여 주셨습니다. 그것이 지금 살고 있는 집이지요. 서울시에 가서 집 열쇠를 받아들고 우리 세 모녀는 너무도 기뻐서 손을 마주잡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제 좋든 나쁘든 집은 장만이 되고 남은 것은 먹고살아 나갈 생활방도였습니다.

그 당시 저는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 민정장관(民政長官) 안재홍씨도 방문하고 경무부장 조병옥씨도 방문하였던바 조병옥씨 말씀이 모자 무두 경무부에 나와서 일을 하면 어떠냐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의 만류도 있고 해서 양자로 있는 사람을 경위(警衛)로 취직시켰습니다. 다만 이러니 저러니 해서 두 달인가 석 달 후에야 비로소 발령을 받았지요.

근무는 인천이라 추운 겨울날 북아현동 산 밑에서 새벽 일찍이 출근하여 밤늦게야 돌아오고 그렇게 지내다가 마침내는 폐가 나빠서 신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그 수입으로 근근이 살아오기는 했으나 여순반란사건 때 전투대에 참가하여 부상을 입고는 병상에 눕게 되었지요. 이래서 생활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참혹했습니다. () 여사가 때때로 쌀을 갖다 주셨고 찬값도 이삼천원씩 주셨습니다.

그러다가 그때 신한공사(新韓公司) 총재로 계시던 C씨가 영등포에 있는 땅 천평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돼지를 치고 집에서는 닭을 쳤습니다. 이것이 6.25 직전까지 돼지 서른다섯 마리, 닭 백 마리가량으로 늘었습니다. 6·25동란을 맞이하여 양자 되는 사람이 경찰이라 해서 영등포에 있는 돼지는 그들이 죄다 가져갔습니다.

집에 있던 닭은 파편을 맞아 죽기도하고 나머지는 생활이 궁할 때라 잡아먹기도 하고 이러하여 모두 없어졌지요. 6·25 때 공산당 사람들이 여러 차례 찾아오기는 했으나 양자는 병으로 누워 있고 집안 살림도 말씀이 아닌지라 별반 해롭게 굴지는 않았습니다. 더구나 9.28수복 때 제가 살고 있는 북아현동이 최전선이 되어 이웃집들은 적지 않게 피해를 입었습니다만 저희 집 장독대와 우물에는 파편 하나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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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후퇴 때 양자는 끝내 세상을 떠나고 저와 딸 둘은 대구에 내려가 저는 천주교에서 세운 효성여자대학에서 불문학을 가르쳤습니다. 대구시장께서 쌀 배급을 주셔서 그럭저럭 생활은 유지되었고 큰딸은 육군중령으로 있는 지금의 사위와 결혼을 하였지요. 제가 효성대학에 나가다가 하루는 얼음판에서 넘어져 절골을 당하고 그때 혈압이 230으로 고혈압에 몹시 신음한 바 있었는데 지금도 그 병세 때문에 적지 않은 괴로움에 잠겨 있습니다.

이렇게 모진 고생을 하면서도 저는 늘 선친의 교훈을 잊지 않습니다. 고생하고는 모진 고생이기도 하지만 선친에 비한다면 이것이 무슨 고생이 될까 자탄하면서 지내왔습니다. 서울로 돌아올 때에는 그곳 학생들이 모아둔 고마운 전별금도 있었고 그리하여 다시 옛집으로 들어왔습니다.

안중근 의사를 역이용하는 사람들?

생활은 사위 몫으로 배급 나오는 쌀로 그럭저럭 유지해왔고 해가고 있습니다. 둘째딸은 리더스다이제스트 사에 근무하여 집안 살림도 조금씩 도우면서 저금을 계속해오다가 이제 시집갈 나이가 되었으나 좀 더 공부를 해야 한다고 지난 120로스앤젤레스로 떠났습니다.

서울에 돌아왔어도 생활 때문에 네다섯 명의 개인교수도 했으나 혈압이 자꾸 높아가고 그래서 그것도 그만두었지요. 다만 집주위에 꽃을 재배하는 것을 일삼고 그날그날을 보내왔습니다. 앞으로 저의 오직 하나 큰 희망은 선친의 유언대로 선친을 고국으로 모셔오는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이와 같은 국제정세에서는 당분간 어려우리라 생각되어 퍽 마음이 괴롭습니다.

또한 제가 불쾌하게 생각하는 것은 선친의 이름을 이용하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안중근 의사의 어떻게 되는 사람이요" 하면서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불미한 일을 하고 있다는 풍문을 허다히 듣고 있습니다. 풍문만이 아리나 실제 만나본 일도 있습니다.

지난번에 '안희자'라는 여성이 저를 찾아와서는 언니라고 하면서 자기도 선친의 따님이라고 해요. 그래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습니까! 저는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딸은 저 혼자뿐이라고 간단히 대답해 주었지요. 그랬더니 그 사람 말이 자기는 어릴 때부터 홀로 객지에 나왔기 때문에 기억이 확실치는 않으나 그렇다면 질녀가 되는지도 모른다고 엉뚱한 말을 하지 않아요. 그래 질녀가 있기는 해도 이미 세상 사람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안미생, 안련생 두 사람밖에 없어요.

또 자기가 일본에서 자랐다고 하기에 그럼 일본 어디서 자랐느냐고 물었더니 기억할 수 없다고 대답해요. 우리 집안사람은 일본에 갈 리도 없고 갈 수도 없다는 것은 누구든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에요. 저는 길게 말할 흥미조차 없어 저를 찾아온 목적이 뭐냐고 했더니 태연스럽게도 다음과 같이 말하는 거예요. 지금 땅도 얻게 되고 그리하여 학교를 짓고 저를 교장으로 모시겠는데 다만 필요한 것은 자기가 선친의 따님 혹은 질녀가 된다는 것을 증명해달라고 하지 않아요. 세상이 혼란하기로서니 이런 일이야 어찌 꾸며질 수 있겠습니까. 저는 다시는 찾아오지도 말라고 하면서 돌려보냈지요.

평소 하고 싶은 말도 많았고 느낀 바도 않았던지라 두서없는 말 길게 늘어놓은 것 같습니다. 저는 하루바삐 선친을 고국에 모실 수 있는 그날이 돌아오기를 빌면서 끝을 맺습니다.




흔히 인터넷에서 많이 사용되는 긍정을 뜻하는 '당근'의 어원은 어디에서 유례했을까?

그 말의 발생과정을 확실히 알고 있는 당사자 중에 한명이기 때문에 인터넷에 기록을 남겨 놓는다는 의미에서 그 의미를 이야기해본다.


당연 - 당삼 - 당근 - 말밥

처음 당근이라는 말이 사용된 시기는 89년 PC통신 채팅에서 부터였다. 당시에는 그래픽이 전송되는 통신속도는 기대할 수 없고 그저 문자만이 전송되는 것 조차도 버거워서 타자속도를 통신이 감당하지 못하던 시절이다.

그래서 말을 줄이고 오타는 무시되곤 했는데 그 중 하나가 '당근'이라는 말의 탄생이었다. 이 말이 출현하게 된 이유는 다음 두가지다.
 
첫번째 당연()이라는 말이 뿌리와는 전혀 상관이 없음에도 연근(根)이라는 식물을 연상하면서 뿌리와 연관을 지었다는 측면이 있다. 그 증거가 저 위에 나와있는 중간에 당삼(인삼을 연상한 단어다)이라는 용어다.

두번째는 빠른 타자에서 당연보다 당근이 조금더 편하고 말이 재미있어진다는 이유로 당근이라는 말이 널리 쓰이게된다. 당연이 당근보다 타자에서 편하다는 뜻은 단어에만 국한된게 아니고 이어지는 말 '당연하지'와 '당근이지'를 비교한 이야기다.

당근에서 다시 말이 좋아하는 음식이라는 이유로 말밥이라는 말이 최종적으로 연관지어져서 사용되게 되지만 타자에서는 불리한 만큼 농담이상으로는 사용되지 않는다. 지금은 어원은 없어지고 당근이라는 말이 독립적인 뜻으로 쓰이게된다. 거기에는 당연이라는 말이 한자 말로 쉽게 와닫지 않는 다는 측면이 강하게 작용했지만 그 어원은 뜻으로 남아서 '당근이지'의 말에 '당연하지'를 대입하면 정확하게 뜻이 전달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 위의 적혀 있는 소제목의 말은 '당연, 당삼, 당근이지'라는 말로  어원이 살아 있는 동안 강조의 의미로 종종 사용되곤 했다.
  1. 리카르도 2008.09.04 23:44 신고

    글 잘보고 갑니다. 생각없이 쓰던말이 갑자기 새롭게 보이네요.
    연과 근..

최근 북한의 김정일 와병설로 인해서 여러가지 이야기가 오가는 중에 유사시 북한으로 중국군이 출병해야된다는 중국 네티즌의 주장을 볼 수가 있다. 왜 그들은 북한에 당연히 출병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거기에는 중국이라는 국가 성립에 북한이 가지는 중요한 명분이 있고 중국 네티즌은 그 것을 당연하게 배웠기 때문이다.

우리는 국제사회에 속한 우리의 입장을 생각할 때 너무 우리 중심적으로만 해석하고 이해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물론 우리 입장을 가지고 관철해 내기 위해서는 이런 모습도 의미가 있지만 이런 모습이 강할 경우 그야 말로 우물 안의 개구리 꼴이 될 위험도 커진다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과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미국과 중국의 입장에서 한번 바라보자 그러기 위해서 먼저 우리의 입장을 돌아 보자.

 

이 글은 최근 북한의 정변에 대한 우리의 대응과 이에 대한 중국 네티즌의 북한에 대한 출병요구에 대한 대응을 다루기 위한 사전 포스팅입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대한민국

긴 말이 필요 없이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은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이다. 너무도 명백하고 단순한 논리 이기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할 이유도 업고 헌법에 저 내용을 명시하고 있다. 다만 내부적으로는 현재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역사 인식 차이로 약간의 논란이 있을 뿐이다.

 

대한민국의 수립 1948년 8.15


북한 입장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름 너무 길게 지었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약칭 공화국이다.)

북한의 경우는 조선의 법통을 이은 한반도 유일의 정부라는 입장이다. 고대사로부터 계승되는 법통을 강조하기 위해서 단군왕릉 복원 같은 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북한의 경우 논란거리는 별로 없다. 한 번 정권이 수립된 이후로 바뀐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누가 딴죽을 걸겠는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1948년 9.9


하지만 이 두가지 주장을 외국인의 시각으로 본다면 한반도에 존재하는 두 국가가 서로 전통적이고 유일한 합법 국가라고 주장하는 모습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특별한 이해관계가 없다면 그야 말로 아무나 이겨라’, ‘이긴 놈 우리 편이라고 응원해도 이상 할게 없다. 하지만 국제 사회도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측과 북한을 지지하는 측으로 명확하게 나누어 진다. 왜일까?

여기에는 바로 특별한 이해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냉전시대였다면 공산주의 진영과 자유주의 진영이라고 이야기 하겠지만 더 이상은 냉전의 시대가 아닌 만큼 미국과 중국의 시각으로 바라보자.

 

 

항미원조(抗美援朝)

중국이 남한과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은 저 항미원조라는 말에서 그 함축적 내용을 알 수 있다. ‘항미원조 미국에 대항해서 조선을 구했다; 바로 중국이 6.25전쟁(한국전쟁)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각이다. 6.25전쟁을 통해서 일본이 경제가 다시 살아 났다는 이야기를 흔히 하지만 중국도 많은 것을 얻었다. 여기서는 그 중에서 명분과 관련된 이야기만 한다. 중국 입장에서는 항미원조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바로 한국전쟁을 통해서 지금의 중국이라는 나라가 존재를 드러냈고 건국의 이념을 실현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중국 내부의 평가를 요약하면  청일전쟁 패배로 인한 중국의 수모를 비로서 회복한 전쟁이라는 의미를 두고 있다.

 

미국에게 승리했다는 느낌 팍팍


중국은 한국전쟁을 미국과 싸워서 자신들이 이긴 전쟁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결국 북한은 중국에게 있어서 자신의 건국이념을 투사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대외적으로 보여주는 광고판과 같은 역할을 하는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중국 입장에서 볼 때 북한의 몰락은 자신의 패배 또는 역사적 정통성의 일부 회손이라는 느낌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그래서 북한과의 관계가 혈맹이라는 공식적인 모습을 가지게 된다.

때문에 중국에서는 북한정권 수립에 소련이 어떤 역할을 했고 당시 중국은 어떤 입장이었는지 또 6.25전쟁 발발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지를 언급하지 않는다. 오직 중국군이 개입하는 시점부터 이후 휴전까지의 상황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사진만 보면 중국의 승리

용감하기 싸우는 중국군



참고적으로 중국에서는 한국전쟁에서 중국군의 참전 성과를 우리하고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본다는 것이다. 항미원조 자체에 중국군이 미군에 승리했다고 주장하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 우리 국군과의 전투에서의 승리를 널리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인해전술이라는 말로 중국군의 활약을 비하하지만 실상 현리전투 같은 경우를 보면 우리 국군의 무능한 지희부와 뛰어난 중국군의 능력이 비교되기 때문이다.

필승이라면서 사단기가 왜 저기있나?

저들 입장에서는 수북


유명한 현리 지구 전투에서 무능한 지휘부가 겁을 먹는 바람에 국군 군단 하나가 괴멸되는 치욕을 겪었고 중국은 이런 전과를 통해서 한국군을 무능한 군대로 낙인 찍어 버렸다. 그리고 그런 인식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미국의 모범생

미국은 그 동안 세계 이곳 저곳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그 가치를 퍼트린다는 명분으로 많은 전쟁을 치러왔다. 여러분은 그 명분이 실현된 국가를 혹시 아는가? 월남전쟁, 이라크전쟁, 칠레 쿠데타 등에서 군사적 개입을 하고 세계 이곳 저곳에다 막대한 경제 원조를 실시했지만 저런 명분을 실질 적으로 실현한 국가는 쉽게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현재까지 미국의 군사개입과 경제원조를 통해서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안정된 경제 기반을 가진 국가는 단 한 나라뿐이다. 그건 바로 대한민국이다.

 

gnp county map 2003

이정도 됐다 역시 통일이 필요하다.

아에 안보이는 나라 태반(신대륙 제외)


미국 입장에서 대한민국은 자신들이 그토록 외쳐온 그 명분이 허황된 구호가 아니라는 유일한 증거인 것이다. 우리가 미국의 주요 우방인 이유는 미국의 군사력이 필요하기 때문만도 아니고 지정학적 위치가 중요하기 때문 만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모범생이라는 호칭도 있다. 흔히 ‘‘미국의 모범생이라고 한국을 이야기하면 모범생이라는 번역상의 어감으로 인해서 나쁜 인상을 받기 쉽다. 그래서 진보계열의 글을 보면 부정적 어감으로 모범생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하지만 모범생을 mode student’라는 원문으로 보게 되면 그런 부정적인 의미 보다는 단순한 뜻을 가진다는 걸 알 수 있다. 서양식 제자와 학생 관계는 동양식 사제관계하고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아무튼 미국입장에서 대한민국은 자신의 명분이 허황된 구호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소중한 광고판인 것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의 국화처럼 한 국가의 성립은 다른 국가에게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대한민국이 꼭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저런 타국의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니다. 이해 관계가 있는 국가간에는 모두 저런 관계가 성립되는데 영국과 인도, 베트남과 중국 등 모든 국가는 저런 구체적인 의미가 있는 관계가 있다. 아마 영국과 미국이 가장 대표적인 관계이겠지만 말이다.

 

이런 복잡한 국가간의 관계들이 얽히면서 해외의 다른 국가들이 대한민국과 북한에 대한 고유한 입장을 가지게 된다.  경제, 군사적 이해득실이 국제 관계의 가장 강력한 근본이지만 실제로는 이런 관계조차도 보다 근본적인 역사적 명분이 근저에 흐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그토록 치열한 냉전시대에도 공산진영이라고 모두 동맹관계가 아니었고 민주진영이라고 모두 우호관계는 아니었던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1. 명이 2009.01.13 23:04 신고

    RSS수집이 안되시와욤~ 확인확인!!!
    날 추운데 감기 조심하고 계시죠잉??? 일단 선댓글 남기고 후 글 감상 들어갑니다아~

  2. 쩝.. 2009.04.21 22:21 신고

    쩝 오늘 블로그 1시간째 재미있게 보고있습니다만

    오타가있네요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예요 잘헷갈리지만..

[Why][이인식의 멋진 과학] 잘 놀면 우파다   [미리보기]  2008.10.11 (토)
   앨퍼드에 의해 재확인됐다. 2008년 '사이언스' 9월 19일자에 발표한 논문에서 앨퍼드는 강력한 정치적 신념을 가진 보통사람 46명을 대상으로 실험을 실시한 결과 위협을 느낄 때의 생리적 변화와 정치적 견해 사이에...


보수성향을 지닌 사람은 겁쟁이? | Oddly Enough
2008년 9월 23일 ... 실험 결과만을 놓고 보자면, 이 글의 제목 그대로 보수성향을 지닌 사람들은 '겁쟁이' 라고 부를 수도 있겠군요. ... 보수는 언제나 겁쟁이에 기회주의자에 비겁자고, 진보는 언제나 정의롭고 진취적이며 올바른 것인가? ...

과학적 연구 결과를 가지고 정치적 해석이 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극단적인 경우를 페미니즘의 과학적 근거로 삼았던 남자로 태어나서 여자로 키워진 존도우의 비극적 일생을 생각하지만 21세기에 들어와서는 개놈 프로젝트와 함께 인간 본성에 대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훨씬 흥미 있는 연구들이 많이 쏳아저 나오고 있습니다.

정치적 성향이 유전이라는 추정이 있습니다. 과거의 연구를 통해서 결과는 어느 정도 예측되고 있지만 추론이나 가설이 아닌 확실한 결론은 아직 연구 중이긴 합니다. 어떤 외부 자극에 의해서 그 성향이 달라지지만 기본적으로는 타고 난다는 겁니다. 여기에는 IQ라든가 부자라든가 여러가지 우리가 기존에 생각 못했던 또는 정치적 이유에서 부정됐던 성향들이 포함됩니다.

우리 얼굴은 서로 다릅니다.
우리는 누구나 일란성 쌍둥이가 아니라면 얼굴이 모두 다르고 이걸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이런 사실은 눈에 보이기 때문에 의심하지 않고 누구나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외 얼굴이 모두 달라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보는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이유는 다양성만이 우리(인간이 아닌 생물이라는 넒은 개념의 우리)의 생존을 보장해줬기 때문입니다. 환경의 변화라든가 생존을 위협하는 상황(죽음이 아닌 멸종을 뜻합니다.)이 벌어졌을 때 이를 막는 유일한 방법이 다양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영화나 소설을 통해서 무시 무시한 전염병을 통해서 인간이 멸종하는 겨우를 가정한 소설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인간 유전자의 다양성이 이런 최악의 재앙을 막아줍니다. A라는 병에 강하고 누구는 B라는 병에 약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A라는 치명적인 병이 유행해서 B라는 병에 강한 사람이 다 죽는다고 해도 A라는 병에 강한 사람은 살아 남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AIDS라는 아직까지도 치료약이 없는 병 조차도 자연 치유하는 사람이 존재하게 됩니다. 이걸 우리는 명역체계라고 합니다. 이쯤에서 그럼 A,B,C,D 다 강한 사람이면 될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분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러면 F라는 병이 발병하겠지요. 왜냐하면 병균 입장에서도 살아 남아야 하니까요. 방법은 F가 나와도 막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 쪽을 선택하게 됩니다.

이와 관련되어서는 두가지 유명한 사례가 있습니다. 아일랜드의 감자기근과 프랑스 포도의 멸종입니다. 두 경우 다 한 품종으로 통일됐을 때 생물이 얼마나 취약한 가를 보여줍니다. 감자기근은 수많은 아일랜드 인이 굶어 죽고 미국으로 대량 이주하는 사태를 촉발했고 프랑스 포도의 멸종은 더이상 프랑스에 진짜 프랑스 포도는 없는 상황을 만들어 냈지요.

눈에 안보이는 내면은 어떤가?
우리는 사람들의 성격이 다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사람들이 얼굴이 다 다르다는 사실 만큼 쉽게 다른 사람의 성격이 나와 다르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 들이지는 못하는게 현실립니다. 물론 요즘은 미남 미녀를 한없이 추앙해서 개성이라는 부분이 한 없이 폄하되는 세상이지만요.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성격의 근본 연구는 초창기입니다. 과거에 알던 사실과 비교하면 논라운 연구결과들이 무수히 많이 있지만요. 저 연구 결과도 그런 연구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면 성격은 왜 달라야 할까요? 극단적인 예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정신병이 아님에도 빠딱한 성격이 있습니다. 꽤나 골치 아플 수도 있는 성격이지만 우리가 현대의 문명사회에 살기 전에는 우리 멸종을 막아 주는 성격일 수도 있습니다. 산넘어에 멋진 숲이 있어서 모두 이주 할 때 삐딱선을 탄 그는 혼자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숲에 산불이 나서 모두 전멸한다면 혼자 살아 남겠지요.

우리는 무슨 일을 벌일 때 의견 일치가 안된다고 짜증 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실상 우리는 의견 일치가 안 되도록 프로그래밍 된 존재입니다. 적당히 무리 짓고 적당히 흩어지는 성격이어야지만 멸종을 피할 수 있었으니까요.

정치적 서향을 봤을 때 모두가 진보이거나 모두가 보수라면 위험하지요. 그랬다면 아마 핵전쟁을 100번쯤 해서 멸종했던지 선사시대에 위험한 모험만 일삼다 멸종 했겠지요. 모두가 배를 타고 용감한 탐험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소심하게 집을 지키면서 밭을 가는 사람도 필요하지요. 이런게 내면의 다양성이고 우리의 본성입니다.

참고:
1. 인간의 본성의 요소는 연구중입니다. 다만 소심함 용감함 진보 보수 이런 본성은 결코 없습니다. 이런 요소들은 인간이 필요로 만들어낸 개념들이니까요. 쉽게 설명하면 세상을 구성하는 요소에는 읅은 없다는 거지요. 산소와 수소 탄소 등등이 있을 뿐이지요. 성격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대부분 다른 동물들도 가지고 있는 요소일 가능성이 큽니다. 개놈프로젝트는 이런 요소를 밝혀내고 있습니다.

2. 유전되는 본성이라고 해서 자식이 그대로 부모를 닮는 다는 착각(기대 또는 실망)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중에 부모 얼굴하고 똑같이 생긴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엄청나게 많은 형질이 멘델의 유전법칙(엄밀하게는 아니지만)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오묘한 발현이라는 부분도 있습니다.
  1. the1tree 2008.10.21 23:15 신고

    공감하는 글입니다. 다양성으로 인한 자기보존, 발현이 새로운 공존을 가능하게 만든다고 생각해요. 차이가 차이로 끝나지 않은 움직임같은 거 말예요. 잘읽고 갑니다..

  2. 리카르도 2008.10.21 23:26 신고

    한국의 보수로 쏠림이나, 일본의 보수국가화는 어쩌면 퇴화 현상인건지도 모르겠네요.
    멋진글 잘 보고 갑니다

인터넷을 보다보면 80년에 대한 이야기들이 무척이나 많다. 물론 그 80년의 이야기 대부분은 광주와 관련된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조각 조각 나오는 이야기들을 보면 벌써 너무나 오래된 이야기가 되어서 그 때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대부분이고 돌고 도는 이야기속에서 그 때의 이미지가 화석화됐다는 느낌도 든다.

한편으로는 80년 5월의 광주는 엄청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신화가 되가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한다.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전혀 다른 시각의 악다구니가 터저 나오기도 하고 말이다.

이제 근 30여년(한 세대를) 전 이야기가 되었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역사가 되고 역사가들이 좀더 객관적인 시각에서 그 일을 기록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터넷 상에 너무 천편일률적인 이야기들만 떠돌고 있기에 5월 바로 전 4월의 이야기를 해본다.

80년 4월의 다이너마이트

80년 4월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4월의 사건을 미화하는 글들이 최근에는 종종 나오고 있는것도 같지만 5월을 이야기 하는 진보적인 인사들도 4월을 이야기하기는 꺼려했던게 사실이다. 시간이 지나고 4월의 폭력이 잊혀지면서 이를 다시 그리고 있는 시점이다.


고한읍 어딘가에 고래가 산다는 걸 나는 몰랐다.
까아맣게 몰랐다.
'사북사태' 때도 그냥 어용노조만 거기 있는 줄 알았다.
혹등고래가 산 속에 숨어 탄맥을 쌓고 있는 줄은 몰랐다.
그냥 막장인 줄만 알았다.

                                       - 이건창의 '폐광촌을 지나며' 중에서

저 시에 등장하는 사북사태가 바로 80년 4월에 있었던 사건이다. 80년 4월 21일부터 24일까지 강원도 동원탄좌 사북영업소에서 벌어진 폭동이 그 사건이다. 6000여명이 참가한 유혈폭동으로 경찰관 1명이 숨지고 16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던 사건이다.

폭동의 발단은 어용노조(사측과 결탁한 꼭두가시 노조)와 작은 임금이 문제였다. 당시 다른 산업 현장에도 어용노조와 관련된 문제는 많았다. 하지만 사북사태는 왜 사망자가 나오고 끔찍한 고문과 린치가 벌어지는 증오(자세히 언급하고 싶지 않다.)의 잔치가 벌어졌던 것이가? 그 일면은 막장인생(2008/09/02 - [숨겨진 이야기/근현대사 이야기] - 막장인생의 어원)이라는 측면이 작용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또 다른 측면이라고 하면 그 곳이 강원도의 외진 곳(지금도 그렇지만 사건 당시는 근 30년 전이다.)이고 다이너마이트 같은 폭발물을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는 거다. 그들은 더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삶을 살고 있었던 거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4월이 사건이 5월에 끼친 영향

흔히 광주의 일을 이야기하면서 음모론적인 이야기들이 나도는 이유는 광주의 참극이 갑자기 뚝떨어저서 벌어진 것처럼 이야기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80년에는 그러니까 79년 10월(그 이전까지) 부터의 사건의 계속 연속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저런 이야기는 광주사태 청문회에서 신군부측 인사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다. 중앙정부 입장에서 바라본 광주의 일은 4월에 있었던 사건의 연속이었고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렇게 인식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4월의 피가 5월의 더 큰 피를 불러온 측면이 있다는 거다.

첨언: 혹시 처음 듣는 사건이라면 이 짦은 그로 어떤 정보를 얻었다고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겟다. 인터넷의 조각글들은 내용 전달 목적에 상관 없이 받아 들이는 사람이 쉽게 외곡된 정보를 가지게 만든다. 당시 신문기사를 직접 읽어볼 것을 권한다.

우리는 일상에서 막장이라는 말을 종종 사용하고 있다. 특히 인터넷에서는 특히 자신이 막장인생임을 자임하는 많은 사람들을 볼 수가 있다. 그럼 저 막장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막장의 사전적 의미는 "갱도의 막다른 곳"을 뜻한다. 아주 단순한 뜻이지만 막장인생이라는 말이 가지는 암울한 의미를 전달해주는 못한다. 과연 저 막장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건가?

막장에 들어간다는 것은

막장은 사전적으로 갱도의 끝을 의미하지만  막장이라고 우리말 할 때는 탄광의 막장을 의미한다. 그 중에서도 탄광의 가장 깊숙한 끝을 의미한다. 이걸 어떻게들 생각하는지 다른 블로그들을 잠시 검색해봤지만 예상대로 진정한 뜻을 이야기하는 곳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막장에 들어간다는게 얼마나 암울하고 인생의 가장 비참한 바닦을 의미하는지 이제 이야기 해보자
석탄산업은 산업혁명이후에 가장 중요한 산업기반 중에 하나였고 대한민국이 산업화되면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1차 산업이다. 석탄을 캐는 광부라는 직업은 요즘 쓰는 3D라는 용어의 최대치이며 그 중에서도 가장 심한 작업 위치가 바로 막장 생활이다.

1D - 80년대 초반까지도 뉴스를 장식하던 사건 사고 소식에는 갱내사고가 빠지지 않는 단골 손님이었다. 수명에서 수십명의 사람이 탄광이 무너지면서 생매장 되는 것이다. 운좋은 사람들은 기적적으로 구출되기도 해서 언론의 스포트 라이트를 받기도 할 정도로 일상다반사였던 것이다. 이런 사고가 아니어도 진패증이라는 무서운 병이 기다리고 있는게 광부의 생활이다. 미세한 탄가루를 계속 흡입하다보면 폐가 서서히 망가저서(폐에 석탄가루가 쌓이는 거다) 결국은 살이 있지만 숨을 쉴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일상이 끝없는 질식의 연속이 되는 상황에 놓이는 거다. 이제는 세상이 변해서 저런 탄광 사고 뉴스는 중국에서나 들려오는게 요즘이라 천만 다행이라고 하겠다.


2D - 동굴안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듯하다는게 상식이다. 하지만 지하로 수십 수백미터까지 내려가는 상황이 되면 상황이 전혀 다르다. 일반적으로 100미터당 2도씩 상승하는데  남아공의 금광은 지하 3000미터에 위치해서 섭씨50도가 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화순 탄광 같은 경우 현재 550미터 정도 깊이까지 내려간 상태다. 지열과 지하수 때문에 한없이 습하고 더운 곳이 지하 탄광이다. 항상 장마철 한여름에 육체노동을 하는 거다. 더욱이 갱도는 좁을 수 밖에 없고 특히 막장은 한사람이 겨우 몸을 집어 넣을 수 있을 만큼 좁다. 이 안에서 석탄을 캐서 뒤로 계속 보내야 한다. 갱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거운 통나무를 들고 옮겨야 했고 돌덩이나 다름 없는 석탄을 끝임없이 퍼날라야 한다. 그나마 좁은 막장에는 받침용 통나무를 새울 수가 없기 때문에 무너지는 건 그냥 감내해야 된다.

3D - 광부의 시커먼 얼굴은 누구라도 알고 있을 것이다. 사실 얼굴만이 아니다 온 몸이 탄가루를 뒤집어 쓰고 검은 몸이 되어서 지친 몸을 이끌고 교대를 하게 된다. 깊은 곳에서 일하기 때문에 밖에서 나오는 건 오직 근무가 끝났을 때 뿐이다. 당연히 대소변도 그 안에서 해결해야했고 밥도 그 안에서 먹어야 된다. 탄가루가 앉은 검은 도시락을 까먹는 상황을 생각해 보면 그 상황이 얼마나 힘든지 짐작이 될것이다.

탄광촌

저런 환경은 생활이 어려운 시절에도 기피하는 생활이 될 수 밖에 없다. 누가 목숨을 담보로 힘들고 더러운 일을 할려고 하겠는가? 결국 탄광촌에는 사회의 바닦까지 떨어진 사람들 만이 모여들 수 밖에 없게된다. 물론 가정을 이루고 치열한 삶을 사는 사람들도 많았겠지만 결국 범죄자들 부터 시작해서 온갓 사회 부적응자들이 모여드는 곳이 탄광촌이 될 수 밖에 없다.

탄광촌의 어린이들은 그림을 그리면 시냇물도 검고 산도 검고 길도 검게 칠한다고 한다. 본대로 그릴 수 밖에 없는게 어린이고 탄광촌의 풍경은 그런 곳이다.

진정한 막장인생

탄광에서 일한다고 모두가 막장인생은 아닌거다. 막장에서 일해야 막장인생이다. 좁은 막장에 모든 광부가 들어갈리도 만무하다. 사회에서 가장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이 모여든 곳이 탄광촌이지만 그중에서도 신참으로 지역에 연고도 없는 사람이 가장 힘들고 위험한 막장에 배치되는 거다. 바로 그런 사람이 막장인생을 사는 사람인 것이다. 희망도 없고 하루 하루 목숨을 걸고 어둡고 덥고 습한 막장에서 힘들게 탄을 캐고 또 깨는 그런 사람이다.
그럼 사람들이 자조적으로 내뱃던 말이 바로 막장인생인거다. 이런 암담한 현실의 벽은 사북사태의 한 축이 되고 만다.2008/09/09 - [숨겨진 이야기/근현대사 이야기] - 슾픈 계절의 시작 80년 4월


요즘의 탄광은 저런 환경가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 그게 많은 탄광이 문을 닫게 된 이유이기도 하고 정선에 카지노가 들어선 이유이기도하다. 이제는 막장이라는 말 보다는 새우잡이를 이야기한다. 멍텅구리 배를 타고 노예처럼 새우를 잡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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