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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얼떨결에 아이티산업 전자 산업 덕분에 초 일류사회로 진입한 국가다


인터넷 상의 여러 가지 댓 글을 읽다가 추천수 많은 댓 글의 한 문장을 보면서 아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은 얼떨결에 아이티산업 전자 산업 덕분에 일류사회로 진입한 국가다

인터넷 상에서는 우리의 현대사를 폄하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지만 적어도 우리 IT산업의 시작을 한가운데서 겪어온 텔미로서는 어떻게 저런 폄하를 당당하게 말하고 그런 글이 추천을 가장 많이 받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얼떨결이라니 앞 세대의 치열하고 처절한 노력의 결과를 저런 식으로 무시할 수 있는 무지가 걱정스럽습니다.

IT붐이 일어나기 전의 상황

인터넷의 폭발적인 변화가 발생하기 전에 우리 사회는 준비가 있었을까요? 아니면 정말 얼떨결이었을까요? 인터넷의 폭발이 있기 직전에 우리는 그 폭발에 대응할 수 있는 준비가 이미 되어있었습니다.

우선 전화보급입니다. 90년대 초에 우리는 누구라도 원하면 전화를 설치 할 수 있는 인프라를 완성했습니다. 모든 전화 교환기가 전자식으로 변경됐습니다. 사실 당시의 일반인 사이에서는 그게 가지는 의미는 그토록 부러워하던 전화를 누구라도 가질 수 있는 행복한 기쁨이었지만 국가 차원에서는 안보와 중요 인프라의 완성이었습니다.

 

현재의 상황에서도 전화 신청하면 다음날 개통될 수 있는 환경을 가진 나라는 전세계를 통털어도 우리나라 이외에는 거의 없습니다. 지금은 인터넷을 신청해도 바로 개통되지만 외국이라면 정말 오래 걸립니다.

 

또 다른 준비는 전국에 광통신망이 완성되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고속도로이지요. 물론 당시에는 중복으로 설치된 광통신망에 대해서 과잉투자라는 신문기사가 나고는 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기자들 입장에서는 광통신망이란 그냥 대용량의 전화선일 뿐이었으니까요. 이 광통신망을 보유한 회사들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ISP들입니다. KT, 데이콤, 하나로텔레콤, 두루넷, 한전 등.. 물론 지금은 합병 등으로 회사들이 KT, SKT, LGT로 변경되었지만 말입니다.

 

이 시점까지도 전세계 누구도 인터넷 혁명을 예상하지는 못했습니다. IP번호 체계를 고안한 책임자 조차도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터넷 폭발이 있기 직전에 우리는 CDMA 기술을 가지고 무선 통신환경을 완성했습니다. 로열티 관련해서 말이 많았지만 훗날 핸드폰 산업을 이루고 지금 스마트폰 산업의 바탕이 됩니다.

그리고 시 시점에서 상대적으로는 소수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유선 전화망을 통한 네트워크 환경에서 사용하면서 네트워크 문화를 완성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인터넷 폭발이 있었습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인터넷폭발이 발생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이미 거미줄 같은 통신망을 구축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이 망을 바탕으로 전세계 어느 나라보다 값싸고 빠른 인터넷 망을 보급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정치적 결단과 판단 등 우리가 흔히 무시하고 조롱하는 요소들이 모두 결합된 결과물입니다.

이런 환경은 최초의 MP3플레이어를 상용화하는 기반이 됐고 각종 전자산업의 선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됐습니다. 2011년 현재도 해외에 나간다면 우리의 통신환경이 얼마나 앞서있고 편리하게 구성되어 있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에 살면서 앞선 세대가 피와 땀으로 이루어놓은 환경을 누리면서 그걸 얼떨결이라고 단정하는 무지는 이 땅의 어른들을 너무나 욕보이는 말입니다.

세상에는 노력과 준비 없이 얻을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본 포스팅은 미성년자에게는 부담스러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구독을 권하지 않습니다.

사전 경고에도 읽게 된다면 본 글에서 기술한 내용이 모든 진실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사전에 인지할 것을 권고합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부분 중에 하나가 역사적 진실과 거리가 있는 왜곡이다. 최근 방송에서 바우덕이 남사당패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방송을 보면서 왜곡과 미화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방송이라는 특성이 주제에 따라서 내보내는 만큼 어쩔 수 없는 면이 있지만 다른 측면을 모르거나 무시해서 다른 측면만을 부각 시킨다면 그건 잘못된 방송이라고 할 것이다.

 

이 포스팅을 준비하면서 검색을 해보니 사물놀이패를 남사당패의 전통 계승자 이냥 광고하는 홍보기사들 까지도 있었다. 사물놀이와 남사당 놀이는 전혀 다른데도 말이다. 아니 징치고 북치면 남사당이란 말인가?

 

folk music
folk music by JaeYong, BAE 저작자 표시변경 금지 밝고 경쾌한 전통 놀이 남사당놀이...

바우덕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우선 남사당패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보자 남사당패의 실제 모습을 알아야 바우덕이 이야기가 쉬울 것이기에 바우덕이 이야기는 다음 포스팅에서 다루겠다.

 

일단 흔한 남사당패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인식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이것들은 그때 그때의 단편적인 기록에 불과한 것으로 유랑 예인집단의 연원까지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민중의 이해와는 거의 대립적인 입장에서 기술된 문헌들이므로 한결같이 패속패륜집단(敗俗悖倫集團)으로 몰아붙이기에 급급한 나머지, 그 내용상의 분류조차 못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그 밖의 사서류(史書類)나 문집이나 잡기 등에서도 시종 의도적으로 깎아내리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봉건적 질곡 속에서 싹튼 민중의 자생적 연희집단에 대한 지배계층의 도식적 평가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중에서


 

개인적으로도 남사당패를 좀더 현실적인 시각으로 보기 전까지는 저런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거기에는 남사당패에 대한 양반들의 탄압과 착취에 대한 만화나 소설의 영향도 컸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 소설이나 만화는 저런 평가에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물론 그 이전 마지막 남사당패 꼭두쇠였던 분의 증언(뿌리깊은 나무 연재를 통해서 읽었다. 물론 그 잡지 발행 당시에 바로 읽었다는 뜻은 아니다.)을 통해서도 실체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저런 인식에서 벗어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동일 정보를 가지고 나이에 따라서 이런 인식의 차이가 벌어진 이유는 내가 세상을 몰랐기 때문인데 역시 어린이에게 세상은 아름답고 쉽고 단순한 곳이다. 하지만 현실의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는 것이다. 서론이 길어 졌는데 우선 저 인용문이 정당 한가부터 따져 보자.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사당패 말

남사당패의 용어 중에 우리가 일상에서 아직도 쓰고 있는 말이 있다. 특히 10대 청소년들이라면 자주 쓰고 듣는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놀랍지 않은가? 어린 사람들이 남사당패의 용어를 쉽게 일상에서 쓴다니? 방송에서는 이 용어가 나오지 안는다.

 

그 용어는 바로 좆삐리라는 말이다. 그렇다. 욕으로 속어로 사용하지만 이라는 말을 사전에서도 속어라고 표현하지만 순 우리말이고 국어 사전과는 그 본 뜻이 다르다.

 

삐리라는 단어도 국어 사전에 나온다. 남사당패의 초보자 여장을 하였다고…… 남사당 놀이에서 어른 위에 무등탄 아이가 삐리이다.

 

사실 저 좆삐리라는 말을 직접 언급할지에 대해서 상당히 고민을 했었지만 개고생이라는 말이 사전에 있다는 이유로 광고용어로 사용된 것을 봐서 저 말을 직접 언급하는 것이 옳다는 결론을 내렸다. (바로 전에 포스팅했던 꿀벅지 문제와도 연관 지어서……)

 

The Damm Family in Their Car, Los Angeles, CA, USA, 1987, By Mary Ellen Mark
The Damm Family in Their Car, Los Angeles, CA, USA, 1987, By Mary Ellen Mark by Thomas Hawk 저작자 표시비영리 남사당패같은 떠돌이 생활에는 필연적으로 어두운 구석이 있다.

좆삐리라는 단어의 정확한 글 뜻은 몰라도 어감으로 무슨 뜻인지는 다 알고 욕으로 사용한다. 그리고 거기에 남사당패의 어두운 면이 모두 들어있는 것이다.

 

남사당패의 기예가 전통적으로 문화적으로 예술적으로 가치가 있고 멋진 것은 명백하지만 저 좆삐리라는 말이 가지는 어두운 면도 명백하게 남사당패의 한 모습인 것이다.

 

여기까지 이야기 했을 때 대략 눈치 빠른 분이라면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를 했을 것이고 순수한 영혼을 가진 분이라면 아직 이해를 못했을 것이다.

 

일단 저 인용문에서 말하는 패속패륜집단(敗俗悖倫集團)’이 정확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또한 마을에 힘있는 양반들이 남사당패의 진입을 막으려고 한 것은 결코 사리 사욕의 욕심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마을 사람 모두가 환영할 상황도 아니었는데 그건 저 삐리의 존재 이유와 충원방법의 문제 때문이다.

 

삐리의 충원

떠돌이 남사당패가 자기 자식도 아니고 어디서 어린이 삐리들을 충원한다는 말인가? 당연히 유괴가 횡행한 것이다. 서두에서 언급한 마지막 남사당패였던 분은 자발적 가출을 하였다고 말하지만 부모입장에서는 그 것도 유괴나 다름없었다. 어린 아이를 어른이 유혹해서 가출을 시켰으니 말이다.

 

요즘 죄명으로는 미성년자 약취유인이다. 다른 문헌을 보면 각 남사당패는 삐리의 확보에 열을 올렸고 이유는 수입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장한 삐리가 사당패의 수입에 큰 영향을 준다면 물정 아는 어른이라면 쉽게 상황을 상상할 수 있다.

 

사당패와 남사당패

우리가 요즘 아는 놀이 패는 남사당패이다. 하지만 남자 사당패라고 특정하는 것은 여자 사당패가 일반적이고 먼저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여자들로 이루어진 떠돌이 기예 집단이 어떤 존재였는가는 쉽게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좆삐리보다 아름다울 거 없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무조건 도덕적 잣대를 들고 설치는 모습을 혐오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무어라고 평가할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쉽게 미화할 모습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도 여자 사당패야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웃음 파는 직업의 모습을 가진다지만 남자들로 이루어진 남사당패는 그런 모습이 쉽게 상상이 안 간다.

 

사당패에서 삐리가 왜 좆삐리인가?

삐리가 왜 남사당패의 중요한 수입원이며 좆삐리라는 호칭까지 듣는 존재인가? 그것은 삐리가 남사당패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암동모(아내)가 되어서 숫동모라고 칭해지는 기존의 단원관 성적인 관계를 가지게 되고 거기에 더해서 머슴이나 떠돌이 장사들에게 남색까지 팔아서 허우채(화대)를 벌어 오는 존재가 됐기 때문이다.

 

이에 관한 증언은 내가 읽었던 뿌리깊은 나무라는 잡지를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연재물을 모아서 현재는 숨어사는 외톨박이라는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있다..

 

이쯤 되면 패속패륜집단(敗俗悖倫集團)’이라는 호칭이 결코 근거 없는 폄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수 있다.

 

문제는 저 인용문을 작성한 저자들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저런 식으로 기술하는 왜곡을 하였다는 것이다. 마을을 책임지는 양반이라면 당연히 남사당패의 마을 진입을 막으려고 하는 것이 정상인 것이다. 어린아이 가진 부모들도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상황을 아는 저자들도 좋은 말을 써 놓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실상 여기서 언급되는 사실보다 훨씬 심한 경우도 종종 있었을 것이다.)

 

물론 무료한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프로 놀이패를 반기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지금 유흥가를 극구 반대하는 사람들과 거기서 즐기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 유흥가를 양반지배층과 대립되는 민중들의 어쩌구저쩌구로 기술 할 수 있겠는가?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SG101302
SG101302 by sicrone 저작자 표시비영리 멋진건 멋진거다.. 연예계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결국 남사당패 자체의 문화에 대해서는 지나친 미화의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 당시 사회에서 그들은 필요악인 존재였고 마냥 환영 받을 수는 없는 그런 존재였던 것이다.

 

그리고 저런 그들만의 생활을 알고 있던 개인적 감상에서 영화 왕의 남자는 짜증나는 측면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의 일상의 삶은 영화 속에서의 그런 상황이 그런 갈등을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충분히 특수하고 비정상적인 상황이 일상인 그들인데 말이다.

 

참고로 남사당패의 저런 용어 중에는 이얏 동모라는 호칭도 있다. 삐리가 아닌 성인의 경우 여자 역할을 하는 동성애자를 칭하는 호칭이다.

 

마지막으로 인터뷰를 인용하고 다음 바우덕이 포스팅을 약속한다.

삐리들은 밤이면 뜬쇠(남사당 연회 선임자)들의 암동모 노릇을 하거나 머슴이나 갓장사같은 떠돌이 장사꾼이나 수염이 허연 노인들에게도 남색을 팔아야 했다. 그들의 기억에 따르면 남색을 가장 즐기는 곳은 서울이며 특히 마포 근처의 뱃사람들이 남색을 밝혔다...... 그들(인터뷰 대상이 된 노인들)도 삐리였을 적에 남색을 팔기도 했다. 그는 뱃사람들이 술냄새가 푹푹 풍기는 입으로 입맞추자고 달려들면 지독한 구린내가 났다고 했다. 언젠가는 대전에서 어떤 사내가 굴 구경시켜 준다는 바람에 따라갔다가 굴 속에서 머리를 땅에 처박히고 겁탈을 당했는데 침 칠도 하지 않고 마른 자지를 항문에 집어 넣는 바람에 며칠 동안 아파서 혼이 난 적도 있었다며 웃었다. 남색에 맛을 들인 사내들은 예쁜 아내가 곁에 있어도 사내 아이들을 끌어들인다며 알 듯 모를 듯한 웃음을 웃기도 했다
                                                                [숨어사는 외톨박이](1977. 뿌리깊은 나무)

 
+ 이 포스팅은 당대의 도덕적 잣대와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미 역사속의 이야기인 만큼 현대의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1. gg 2009.09.26 20:44 신고

    고삐리는 좆삐리에서 파생된 단어이군요..;;

    그나저나 서울은 역시 예나제나 유흥의 최첨단을 달리는 곳인 듯. ㅋ

  2. sepatu safety 2013.06.17 12:25 신고

    난 당신이 조금 당신의 블로그의 디자인과 사용성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생각.

  3. 호호 2015.07.10 01:00 신고

    당시엔 미성년자도 강제로 시집 장가 보내던 시절... 그냥 성적 해방의 일면일 수 있겠네요.. 당시에도 패륜집단이라고 보진 않았을거구요. 동성애도 역사상 늘 있어 온거고.. 현대의 마사지샵이나 기타 매춘 문화도 무시 못하는데, 패륜 집단으로 정의 내리기엔 무리가 있어 보입ㄴ다.

  4. ㅇㅇ 2016.03.17 06:20 신고

    사실 조선시대가 현대보다 성적으로 문란했어요 -_-.. 아주 일상적으로 좆질 씹질 이런 섹드립쳤죠 처음본 사람끼리. 되려 근대에 기독교랑 서양문화 영향 받으면서 보수적이게된거임

MBC '선덕여왕', 시청률 40% 넘었다

2009년 8월 19일 수요일, 오후 5:45:32전체 문서로 이동
(서울=연합뉴스) 임은진 기자 = MBC 월화드라마 '선덕여왕'(극본 김영현ㆍ박상연, 연출 박홍균ㆍ김근홍)이 시청률 40%를 넘어섰다. 19일 시청률 조사기관인 TNS미디어코리아에 따르면 전날 오후 10시10분에 방송된 '선덕여왕'은 전국 시청률 42.0%를 기록했다. 수..

국내 사극을 보면서 많이 우려스러운 점이 역사를 마음대로 왜곡하고 그 것때문에 사람들이 잘못된 역사인식을 가지게 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항상 떨칠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도 재미있게 보는 선덕여왕이라는 드라마에서도 이 문제를 떨칠 수가 없는데 특이 이런 우려에 더욱 신빙성을 더해준 것은 다음과 같은 기사의 한 대목이다.

이어 원천대사가 직접 들고온 도면을 공개한 덕만은 "서라벌 땅에 천문관측의 기준점이자 모든 백성이 볼 수 있는 책력, 그 책력을 건축 물로 지을 것이다"라고 알렸다."이로써 신라인이면 누가나 천기의 운행을 알 수 있을 것이며, 앞으로는 천문을 독점해 온 신당과 그 누구라도 백성들의 무지를 이용해 불안을 조장하고 사익을 채우지 못할 것이다"고 위엄있게 경고했다.

'선덕여왕'을 통해 첨성대의 건축 이념과 숨겨진 뜻에 대해 알게 된 소중한 시간이었다는 반응에 힘입어 '선덕여왕'은 시청률 40%(AGB닐슨)를 넘어서며 국민 드라마 반열에 올랐다.


사실 선덕여왕이라는 드라마는 '화랑세기'를 기준으로 많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드라마이기 때문에 정사(正史)와는 어느정도 거리가 있는 드라마라는 숙명을 가지고는 있다. 그건 '화랑세기'가 가지는 숙명적 한개때문인데 개인적으로도 '화랑세기'를 진본이라고 어느정도 믿고 있지만 아직까지 원본이 없는 이상 소설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없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선덕여왕'은 덕만이라는 화랑은 존재하지도 않고 쌍둥이도 아니고 선덕여왕이 언니이고 등등의 기본적인 드라마적 허구를 가지고 시작했기 때문에 조금만 알고 본다면 전혀 역사적 사실과는 개구리 발톰만큼의 연관도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저 인용기사와 같은 내용이 퍼지는게 현실이다. 흔히들 사극에 대해서 역사 왜곡을 이야기할 때면 '드라마는 드라마다 다 구별할 수 있다고..'라고 댓구를 하고는 하지만 실제 정사의 내용을 모르는 상태에서 어떻게 허구와 왜곡을 구별해낼 수 있다는 말인가?

결국 드라마의 허구적 역사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은연중의 여러가지 왜곡된 인식을 심어주게 된다는 것이다. 가장 흔한 오류가 당시의 사회를 현대 사회에 투영해 놓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저 인용기사속의 대사 .

"이로써 신라인이면 누가나 천기의 운행을 알 수 있을 것이며, 앞으로는 천문을 독점해 온 신당과 그 누구라도 백성들의 무지를 이용해 불안을 조장하고 사익을 채우지 못할 것이다"

여러분은 저런 문구가 현대에서나 좋은 정치적 구호이지 당시에도 좋은 구호였겠냐는 의문을 가져본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책력에 일반백성이 관심이나 있을거며 그게 그들 삶에 무슨 해택이 있기에 누구나 천기의 운행을 알 수 있게 하겠다는 거란 말인가?

물론 농사를 짓기에 중요하지만 거기(농사에 필요한 천문)에 한정되는 것이지 일식, 월식 기타 등등을 알기 위해서 천문에 관심을 가질 호사가는 정말 드물거라는 말이다.

더욱이 첨성대는 선덕여왕 재위 16년(서기 647년)에 지어졌다는 것이다. 즉위 이후의 일이지 공주적에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말 사실을 알면 가상이 재미있을까?
대부분의 사람은 '김유신'과 '김춘추'가 비슷한 연배의 사람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유명한 김유신 여동생의 결혼이야기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점을 가지고 드라마를 보면 사실과 다른 내용이 드라마의 재미에 끼치는 영향을 좀더 알 수 있지 안을까 생각해본다.

지금의 드라마처럼 김유신, 김춘추, 선덕여왕의 나이가 역사와 다른 점이 재미있게 느껴지는가? 개인적으로는 너무 껄끄럽고 받아들이기 힘들다. 만약에 열러분도 그렇다면 실제 역사내용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그것을 조작하는 것은 드라마의 재미를 반감시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재미가 있다면 실제 역사를 잘 모르기 때문에 드라마에서 설정한 내용을 그대로 받아 들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포스팅이 이미 방송중인 드라마에 영향을 끼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앞으로 제작되는 사극은 대중의 흥미만을 생각해서 역사를 마음대로 왜곡하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게 개인적인 바람이다.


재미도 없고 논지도 없는 글을 끝까지 읽어 주신 분에 대한 감사의 보너스

선덕여왕의 남편은 누구일까?
뭐 개인적으로도 독신으로 오랬동안 믿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유명한 '모란꽃 병풍'이야를 교과서로 배웠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실제로는 신라의 규례에 따라 세명의 남편을 뒷다고 하며 후사를 얻는 데는 실패했다고 합니다. 남편 세명이야기를 교과서에서 가르쳐주기는 무리겠지요. (개인적으로는 이런 역사 교과서에 불만이지만..)

천명공주의 남편은 누구일까?
드라마에서야 덕만대신 죽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덕만의 동생(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기준)이고 그의 남편은 선덕여왕의 당숙인 김용춘이라고 한다. 즉 선덕여왕 입장에서 당숙이자 제부가 김용춘인데 드라마에서는 어떻게 나왔는지 개인적으로는 모르겟습니다.




  1. rmarkd 2009.09.01 15:19 신고

    그동안 방영된 사극들이 국민의 정신세계(가치관)를 너무많이 황폐화 시켰다
    지적수준을 봉건사회로 회귀하는데 ,일조했고 ...
    현대통령을 왕으로 생각하며,정재계 놈들을 특권층이라 칭하며 빌빌대는 노예근성,...
    도전하면 역적이라 생각하고,왕이 먹고 입고,생각들은 하늘에 뜻인양 아부하는 천민근성등등등.....

    그따위 역사 사극들은 방영하지마라,
    국민정서에 패악질일 뿐이다..

    덧붙임..군대문화도 똑같다..

이 기록은 이전 3.1운동에 관련된 학술발표 포스팅에 이어서 실례를 보기 위해서 찾은 자료입니다. 출처 등은 글 말미에 첨부합니다. 딱딱한 법정기록인 만큼 읽는 편의를 위해서 제 생각은 기록 안에 넣어서 간단히 읽고 싶은 분들의 요구를 만족시키려고 합니다.

 

 


대정 8년 형공(刑控) 513

 

3.1운동이 있던 1919 (大正 : 다이쇼) 재판입니다. 다음 동일 사건으로 재판 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나열 됩니다. 피고의 이름을 보시면 무슨 사건의 재판인지 알게 됩니다.

 

   

충청남도 천안군 동면 용두리(東面龍頭里)

농업 조인원(趙仁元)

56

동도 동군 수신면 복다회리(卜多會里)

농업 김상훈(金相勳)

46

동도 동군 동면 용두리 

학생 유관순(柳寬順)

18

 

너무나 유명한 이름이지요. 18세의 유관순열사 바로 아우내장터 만세사건으로 체포된 유관순과 그 마을 사람들의 재판 기록입니다. 재판 기록에도 수천명의 사람이 참가했다고 나오지만 실제 재판에 회부된 사람은 이 분들입니다. 이후에는 존칭없이 유관순으로 칭하겠습니다.

 

동도 동군 동면 동리

교사 유중무(柳重武)

45

동도 동군 수신면 발산리(修身面鉢山里)

농업 김용이(金用伊)

24

동도 동군 동면 용두리 

농업 조병호(趙炳鎬)

21

동도 동군 수신면 복다회리 

농업 백정운(白正云)

24

동도 동군 동면 동리   

농업 신 씨( )  

67

동도 동군 동면 용두리

농업 조만형(趙萬衡) 

21

동도 동군 갈전면 병천리

농업 박제석(朴濟奭)  

19

동도 동군 동면 동리

이발업 박봉래(朴鳳來)

27

 

 위의 11명에 대한 소요 및 보안법위반 피고 사건에 대해 대정 8 5 9일 공주지방법원이 언도한 유죄판결에 대해 피고 11명으로부터 공소 신립이 있었으므로 당 법원은 조선총독부 검사 수야중공 관여로 다음과 같이 심리 판결한다.

 

많은 사람이 참여했던 사건으로 이미 공주 지방법원에서 판결을 받고 다시 경성 복심원으로 항고한 11명의 최종 판결문이다. 그리고 판결문 원본은 당연히 일어로 되어 있는 문서입니다.


위키의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 요약은 다음과 같습니다.
  • 일시:1919년 4월 1일(음력 3월 1일)
  • 장소:천안 아우내 장터
  • 경과:천안 아우내 만세운동은 성공회 병천교회에서 운영하던 진명학교 교사 김구응이 지역 유지들과 젊은 청년, 학생들과 함께 준비한 만세운동이다. 독립선언문을 발표한 김구응과 그 모친 최씨가 총탄에 맞아 즉사했으며, 유관순을 포함한 많은 참가자들이 부상, 투옥등의 어려움을 겪었다.

 


                 

 

원 판결 가운데 피고 조인원, 김상훈, 유관순, 유중무, 김용이, 조병호, 백정운, 조만형, 박제석에 대한 부분 및 피고 신씨에 대한 유죄부분을 취소한다.

피고 조인원, 유관순, 유중무를 징역 3년에 처하고, 피고 김용이, 조병호를 징역 2 6월에 처하며, 피고 김상훈, 백정운을 징역 1 6월에 처하며, 피고 조만형, 박제석을 징역 8월에 처한다.

피고 신씨, 김상훈, 백정운, 조만형, 박제석에 대한 소요 공소사실은 무죄를 언도한다. 피고 박봉래의 공소는 이를 기각한다. 압수물건 가운데 영 제 1호 구한국 국기 한 자루는 이를 몰수하고 여타는 소유자에게 환부한다.

 

이 서류가 발견되기 까지 유관순이 받은 형량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있었으며 재판장에서 의자를 집어 던졌다는 전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해졌던 7, 5년 보다는 작은 3년 형을 최종적으로 언도 받았습니다. 참고로 공주 지방법원에서는 5년형을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형량과 비교해보면 가장 무거운 형량 그룹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특이점은 이전 포스팅 내용을 연상할 수 있는 부분으로 소요 부분에 대해서 무죄를 언도 받은 5명과 공소 기각되는 이발업의 박봉래라는 분입니다. 막연하게 가지고 있던 상황과는 좀 다른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1. 피고 유관순은 재 경성( 京城) 이화학당(梨花學堂) 생도인바 대정 8 3 1일 경성에서 손병희 등이 조선 독립 선언을 발표하고 단체를 만들어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며 각처를 행진하며 독립 시위운동을 벌이고 있음을 보고 동월 13일 귀향하여 4 1일 충청남도 천안군 갈전면 병천(竝川) 시장 장날을 이용하여 조선 독립 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꾀하고 자택에서 태극기(구 한국 국기 압수 영 제1)를 만들어 이를 휴대하고 동일 하오 1시경 동 시장으로 나아가 그곳에서 수천명의 군중 단체에 참가하여 전시 태극기를 휘두르며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고 독립 시위운동을 감행하여 치안을 방해하였고 피고 유중무·김용이·백정운·박제석·조만형·김상훈·조인원·조병호·박봉래는 동년 4 1일 하오 1시경 전시 병천시장에 나가 다수 군중 단체에 참가하여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며 독립 시위운동을 감행함으로써 치안을 방해하였다.

 

유관순이 주모자이며 핵심인물 임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여러 장의 태극기중에 유관순이 사용한 태극기가 가장 크고 아름다웠던 거 같습니다. 남아있다면 문화재 지정감일텐데...

이후의 내용을 보면 당시의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2. 전시(前示) 피고 등이 이와 같이 독립 시위운동을 하자 그곳에서 약 50보 거리의 철천 헌병주재소 헌병이 이를 제지하려 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으매 발포하여 다수의 사상자(死傷者)를 냈으며 피고 유관순의 부()이며 유중무의 형인 유중권(柳重權)도 그 피해자의 한 사람인바 피고 유중무 및 군중은 그 피해자를 둘러매고 주재소로 몰려가 피고 유중무·유관순·김용이·조인원·조병호는 군중에 솔선하여, 유중무는 두루마기의 끈을 풀러 대성격노(大聲激怒)하여 헌병의 목을 졸라 매려고 하였고 또 그형인 피해자를 동 주재소 사무실로 넣으려 하자 이를 제지하려는 헌병 보조원 맹성호(孟星鎬)에 대해너는 보조원을 몇십년 하겠느냐? 때려 죽이겠다고 하였고 피고 유관순은 동 주재소장을 잡아 나꿔채며 항의하였고 피고 김용이는 헌병에게 투석하고 동 주재소 보조원 정수영(鄭壽永)에 대해조선 사람이면서 무엇 때문에 왜놈의 헌병 보조원을 하느냐? 죽여 버리라고 호통치며 주전자를 그의 가슴에 던졌고 피고 조인원은 상의(上衣)를 벗어 동 주재소장 및 헌병들의 총을 나꿔채며 그 아들인 조병호는 전시 헌병 상등병의 뺨을 때리고 협박했으며 군중은 동 주재소원의 총에 달려들어 탄약합(彈藥盒)을 잡아떼며 또는 소장을 죽이라고 외쳐 소란을 피웠다.

 

당시의 상황이 좀더 명확하게 보이는 내용입니다. 그 중 눈에 뜨이는 부분은 유관순의 아버지가 주재소 헌병의 총검에 사망하자 흥분한 사람들이 주재소로 처들어 갔다는 부분입니다. 상황 묘사가 상당히 자세해서 유관순의 작은 아버지가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이후에 주재소측 근무자 시각의 진술도 있기 때문에 흥미롭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아버지의 시신을 모시고 주재소로 처들어 가 주재소 소장을 멱살을 잡고 항의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새롭게 느껴집니다. 더욱이 무장하고 있는 헌병들이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보이네요.

 

 

  1의 사실은 당 법정에서의 피고 유관순·유중무·김용이·박제석·조만형·김상훈·조병호·박봉래의 각각 판시사실과 동일한 요지의 공술 및 피고 백정운·조인원의자기들은 대정 8 3 1일 이후 조선 각지에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는 독립 시위운동이 일어나고 있음에 자기들은 병천 시장에 나가서 군중 시위운동을 구경하고 있었다는 요지의 진술과 원심공판 시말서 중 피고 유관순의압수 영 제 1호의 구 한국 국기는 자기가 만들었다는 진술, 동 피고 백정운의자기는 김상훈이 태극기를 건네 주어 그것으로 만세를 불렀다는 진술과 사법 경찰관의 조인원에 대한 신문조서 가운데자기는 유중무·유중권 및 자기 아들 조병호와 함께 태극기를 앞세우고 자기가 큰 소리로 만세를 불렀다는 요지의 공술 기재를 종합하여 이를 인정하며,

 

소요죄 부분에 무죄를 받은 분들은 자신들은 그저 시위를 구경하다 건네준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불렀다고 진술하는 군요.

재판 결과를 보면 주동은 아니지만 적극 가담자라는 분류를 받은거 같습니다.

 

  2의 사실은 당 법정에서의 피고 유관순은병천 시장에서 만세를 부르고 있을때 헌병 주재소와는 약 50보 거리였는데 헌병이 쫓아와 군중을 향해 발포하고 총검을 휘둘러 즉사 19명 중상자 30명을 내었고 자기 부친도 살해되었는데 헌병이 군중에게 발포하려고 총을 겨누었을때 자기는 쌍방을 제지키 위해 헌병의 총에 달려 들었다고 진술하고 있고, 동 유중무는주재소 헌병이 군중의 행동을 제지하려고 했으나 군중이 이에 응하지 않아 부득이 발포하여 군중 가운데 사자(死者) 2명이 생겼으며 이에 격분한 군중은 시체를 주재소로 밀어 넣었고 자기는 형 유중권이 헌병에게 총검으로 옆구리 및 머리를 찔려 빈사 상태에 빠지자 형을 업고 주재소로 가 치료를 달라고 요구했다는 요지의 공술을 하였고,


 

막연하게 알던 일제시대의 분위기와는 다른 내용들이 들어있네요. 주재소로 가 형(유관순의 아버지)의 치료를 요구했다니 재판 과정에서 필요에 의한 진술인지 진짜 였는지 모르겠습니다.

 

 동 김용이는자기는 주재소로 몰려가 만세를 외쳤다는 진술을 했으며 동 조병호는자기는 조인원의 아들이라는 공술을 했으며 원심공판 시말서 가운데서 조인원의헌병의 발포로 자기는 좌흉부(左胸部)를 맞았고 왼팔을 총검으로 찔리웠고 또한 사망자 2명이 발생하매 그 시체를 메어 주재소로 갔었다는 공술과 검사의 조병호에 대한 신문조서 가운데만세를 외치자 헌병들이 발포하여 일단 피했었고 군중이 주재소로 몰려갔으나 헌병이 시체를 밖으로 내어 던졌다는 요지의 공술 및 사법 경찰관의 김용이에 대한 신분조서 가운데서자기는 헌병에게 한번 투석했고 그 손을 잡아 당기며 병기(兵器)에 손을 댄 일이 있다는 요지의 공술과 원심공판 시말서 가운데서 피고 유관순은만세를 부른 다음 주재소로 가자 부친이 죽어 있었기 때문에 격분하여제 나라를 되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했는데 어째서 군기(軍器)를 사용하여 내 민족을 죽이느냐고 대어들다 헌병이 총을 겨누기에 죽음을 당할까 보아 그 가슴에 달려들었다는 요지의 공술과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이 보이는거 같습니다. 다음의 내용을 보면 주재소 헌병의 입장에서 바라본 만세운동의 모습이 보입니다. 또한 발포 책임자도 명확하게 나옵니다.

아래 내용 중에 18세의 여자 유관순이 소장의 멱살을 쥐고 휘저었다고 나오는데 당시 유관순은 키가 170Cm정도 였다고 한다. 당시로써는 거구인 유관순에게 잡힌 일본인 소장 꼴이 참 아니었을거 같다.

 

검사의 헌병 상등병 진 상부( 相部)에 대한 조서 가운데자기는 철천 헌병주재소 재근(在勤)인 헌병인데 판시 일시, 병천 장날 하오 1시 경 만세를 외치며 군중이 대한 국기를 선두에 세우고 몰려왔기 때문에 해산을 명했으나 응하지 않아 기총(騎銃)을 발포한즉 일단 물러갔으나 그 뒤 이 발포로 말미암아 유관순의 부친과 남씨(南氏)의 남편이 사망하였다고 하여 약 40명의 군중이 그 시체를 메고 주재소로 다시 몰려와 무엇인가 떠들기에 주재소원 너댓 명이 밖으로 달려 나오자 1 5백 명 이상의 군중은 주재소로 몰려오고 있었고 소원 5명은 주재소 앞에 정렬하여 있을 때 유리창이 깨졌으며 그로부터 자기들은 사무소 입구 왼쪽 벽에 병렬(竝列)했는데, 군중은 자기들 5명이 소지한 기총에 달려들어 탄약합을 잡아당기고 소장을 죽이라고 외치며 소장을 끌어 내려하여 권총을 몇 번 발사한즉 군중은 다시 도망쳤는데 그 가운데 피고 유중무는 두루마기의 끈을 풀어 고함을 지르며 헌병을 잡고 조르려는 기세를 보였고 조인원은 처음 시체를 밀어 넣을 때 시체와 함께 들어서서 상의를 벗고 소장의 총에 달려드는가 하면 또한 자기의 총에도 달라 붙었고 유관순은 소장의 착의(着衣)에 달라 혈흔이 부착해 있음을 가리키며 군중에게 무엇인가 외치고 소장의 멱살을 쥐고 휘저었고 조인원의 아들은 자기의 뺨을 한번 때리더라는 요지의 공술

 

다음은 우리가 흔히 친일파 앞잡이의 대표적 존재라고 알고 있는 헌병 보조원의 진술이 나옵니다.

 

기재 및 사법 경찰관의 헌병 보조원 맹성호에 대한 신문조서 가운데대정 8 4 1일 피고 유중무는 그의 형이 장터에서 헌병에 의해 중상을 입었다하여 형을 업고 주재소로 들어오려고 하기에 제지하자 그는 자기들에 대해너희는 몇십년이나 보조원을 하겠느냐? 때려 죽이겠다고 하며 치고 김용이는 자기들에 대해어째서 왜놈들과 함께 일하는 보조원 노릇을 하느냐? 함께 만세를 부르라. 그렇지 않으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이라고 호통을 치더라는 요지의 공술 및 동 보조원정 수영에 대한 신문조서 가운데판시 일시 철천 시장에서 군중이 독립만세를 외치고 있음에 소산(小山) 주재소장 외 4명은 자기와 맹성호에 대해 장터로 출동하니 주재소 사무소를 발포 준비를 하고 있으라 명하고 떠났으나 잠시 후 총성이 들려 왔으며 이윽고 유중무와 김용이는 군중과 함께 부상자를 주재소로 업고와 주재소로 넣으려 하기에 문을 닫자 김용이는 자기들에 대해조선 사람이면서 무엇하느냐? 몇십년 보조원을 해먹을 생각이냐? ‘죽여버리겠다고 하기에 부상자에게 더운 물을 주라고 하며 주전자를 내어 주자 이 따위 물을 마실 수 있느냐고 자기에게 주전자를 집어 던져 가슴을 얻어 맞았다는 요지의 공술 기재를 종합하건대 이상의 사실을 인정한다.

 

당시 헌병 보조원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이 보이네요.

 

 법에 비추어 피고 유관순·유중무·조인원·김용이·백정운·박제석·조만형·김상훈·조병호·박봉래의 제1의 소위는 범죄 후의 법령에 의해 형의 변경이 있었으므로 형법 제8·6조에 따라 신·구 양법을 비교하여 그 가벼운 바를 적용할 것이매 신법에 의하면 대정8년 제령 제7호 제1조 제1항에 해당하며 구법에 따르면 각각 보안법 제7·조선 형사령 제42조에 해당하는 바 형법 제 10보에 따라 각각 구법이 가벼운 바 이의 법조문을 적용코 징역형을 선택, 피고 유관순·유중무·김용이·조인원·조병호의 제2의 소위는 각각 형법 제106조 제2호에 해당되며 징역형을 선택하고 동 피고 등은 형법 제45조에 따라 병합죄임에 동법 제47·10조에 따라 무거운 제2의 죄에 파형할 것으로 동법 제47조 단서의 가중형이 타당하다고 보아 피고 유관순·유중무·조인원을 각각 징역 3년에 처하고 피고 김용이·조병호를 각각 징역 2 6월에 처하며 피고 김상훈·백정운을 징역 1년에, 피고 조만형·박제석을 각각 징역 8월에,피고 박봉래를 징역 6월에 처한다. 피고 김상훈·백정운·신씨가 판시 제2의 소요죄에 가담하여 피고 조만형·박제석이 동소요에 가세(加勢)하고 또는 부화수행(附和隨行)하였다는 공소사실은 이를 인정할만한 증빙이 불충분한바 동 피고 등에 대해서는 형사 소송법 제258조 제 1, 236·224조에 따라 각각 무죄를 언도한다.


 압수물건 중 구 한국 국기 한 자루는 피고 유관순 소유의 제 1범죄 공용물이므로 형법 제19조 제1항 제 2·2항에 따라 이를 몰수하고 여타는 형사소송법 제 202조에 따라 일체 소유자에게 환부한다.

 원판결에 있어 피고 신씨에 대한 소요 공소사실은 그 증거가 충분타고 보아 유죄판결을 했고 피고 김상훈·백정운·조만형·박제석에 대해 소요 공소 사실을 그 증거가 충분타고 인정하여 판시 치안방해 죄와 병합죄로 처단했고 또한 피고 유관순·유중무·김용이·조인원·조병호에 대한 형의 양정(量定)은 과중하여 타당치 않으매 동 피고 등의 공소는 각각 이유있고 피고 박 봉래에 대해 판시 사실을 인정하여 판시 법조문을 적용하고 징역 6월을 선고했음은 타당한 바 동 피고의 공소는 이유 없으므로 동법 제261조에 따라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대정 8 6 30

                                    경성 복심법원 형사부 재판장

                                    조선총독부 판사 총원 우태랑


본 문서는 유관순기념관 자료이며 유관순은 저 판결로 3년형을 언도 받지만 이후 대사면령으로 형이 1/2으로 감형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유관순은 출소 이틀전에 사망하고 만다.

  1. 어멍 2009.04.16 11:50 신고

    치안방해죄, 소요죄, 보안법(현 국가보안법의 모법)...하며 어렵지만 익숙한 법률용어와 문법하며...일제와 지금이 본질에서 얼마나 다르며 우리는 얼마나 이를 극복했는지...헌병보조원 맹성호와 그의 자손들, 당시 법원법률관계에 종사했던 한국인들은 이후 삶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많은 생각이 드네요. 민중은 가장 낮은 곳에 있지만 그들이 내는 힘은 가장 순수하고 강력하지요.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최근 3.1운동 90주년 국내전문가 집중토론회에서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내용이 발표되었다. 워낙 불편한 내용이라서 그런지 널리 보도되지는 않은거 같다.

이런 내용을 애써서 외면하려는 분들도 있고 또는 발표 자체를 매도하는 분도 있다. 뭐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불편하지는 않다. 왜 불편해하는 것일까?

3.1운동은 피지배계급을 역사의 주체로 등장시키고 이는 민주 공화정의 디딤돌이된 근대화 운동이자 민족운동이라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옥중의 유관순누나

17살의 유관순 투옥 사진


이런 해석만을 듣던 사람들이 다른 이야기를 듣게되자 상당히 불편한 해지는 것이 사람 마음이라고 하겠다.

마치 짝사랑하는 순이가 설사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느끼는 혼란된 마음 같다고 해야할까?

이번에 발표된 불편한 이야기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성균관대 천정환 교수는 20일 성균관대 600주년기념관에서 열린 ’3.1운동 90주년기념 국내전문가 집중토론회’에서 발제문 ’소문(所聞)ㆍ방문(訪問)ㆍ신문(新聞)ㆍ격문(檄文): 3.1운동 시기의 미디어와 주체성’을 통해 3.1운동 당시 일부 지식인들이 무식했던 일반 민중에게 시위에 참가하라고 협박한 사실을 주목했다. 그는 당시 재판 기록을 보면 기소된 피고인 중 ’무식자’(無識者)들은 “’유식자’의 선동에 의해 (시위에) 참가했다고 진술”했으며, 유식자들의 선동은 때로 “’만세를 안 부르면 밟아 죽인다’, ’집을 불태워버리겠다’는 협박에 기초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천 교수는 “협박은 주로 마을의 ’유지’ 등 식자층에 의해 행해진 것으로, 그 대상은 특히 ’무식한’ 민중이었다 할 수 있다”고 덧붙이면서 “정치적 무책임의 세계에 살던 민중은 아직 ’민족’으로도 ’민중’으로도 형성돼 있지 않았던 건 아닐까?”라고 조심스럽게 ’3.1운동의 민중 탄생’ 담론을 반박했다.

천 교수는 이 같은 사실들이 “거대한 적과 맞서야 하는 ’운동’의 조급함이 언제나 불러일으키는 ’잡음’ 같은 것”으로 간주할 수 있겠지만 “협박은 연대나 접속이 아니라 무조건 동원 또는 탈접속”이라는 점에서 3.1운동을 통해 민중이 탄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에둘러 지적했다.

천 교수는 또 최남선이 작성한 ’기미독립선언서’와 관련, “추상적인 내용과 극도로 현학적이며 고식적인 문체, 그리고 완벽한(?) 한주국종(漢主國從) 표기법”으로 이뤄졌다고 설명하면서 “이 선언서로 과연 어떻게 민중을 조직할 수 있었을까”라고 의문을 제기했

저런 이야기는 널리 알고 있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가 짝사랑하는 순이는 착하고 이쁘지만 화장실에 가서 볼 일도 봐야되는 바로 내옆의 사람이라는 걸 알아야만 사랑 고백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관순 졸업 사진

1918년 3월 말 즉 윗 사진의 1년전


기실 우리는 3.1운동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독립선언문, 유관순누나, 아우내 장터 하지만 저 인용문에 나오는 '무식자'즉 문맹 또는 무학력인 이들이 어떤 과정으로 생각으로 만세운동에 동참했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볼 필요는 분명히 있다. (생각을 해보면 꼭 저런 협박이 있어야 되는건 아니다. 단순한 일제에 대한 반감만으로도 쉽게 선동 될 수도 있기 때문이고 재판과정에서는 죄를 회피하기 위해서 저런 변명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널리 알고 있는 프랑스 대혁명에서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혁명의 업적이자 상징처럼 널리 알려진)해서 구출해낸 사람은 단지 7명이었으며 그들은 정치 사상범이 어니었으며 구출된 대표적인 인물이 싸디즘으로 유명한 야설의 아버지 사드 남작이었다는 거짓말 같은 진실 말이다. . 개인적으로 사드의 소설을 흥미있어 하지만 그가 거기서 구출된 사실에 그닥 기쁜 감정은 들지 않는다..

그토록 프랑스가 자랑하는 프랑스혁명에는 불편한 진실들이 가득 들어있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은 그런 사실들도 널리 알고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그런 사소한 내용들이 프랑스 대혁명의 가치를 훼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찮가지로 3.1운동이나 독립운동의 불편한 진실들이 있다고 해서 그 근본적인 가치는 훼손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오히려 모든 진실을 알아야만 그 가치를 더욱 진실되게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 폭탄은 무슨 도시락인가?

+ 발표 내용을 직접 본다면 좀더 자세한 이야기가 있었겠지요. 저 인용에서는 독립운동의 조급함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만 이해관계는 다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7살의 유관순이 왜 고향까지 내려가서 아우내의 거사를 치루었느냐 같은걸 생각해 보자는 뜻에서 유관순 누나(영원한...)의 사진을 삽입했습니다.
두번째 사진속의 유관순과 동무들을 보면 피상적으로 생각하던 유관순 보다 좀더 많은 생각을 해볼 수 있지 않습니까? 
  1. 미리내 2009.04.06 15:46 신고

    불편한 진실도 당연히 밝혀져야 하겠지요. 하지만 소위 유식자들이 무식자들을 겁박해서 얻은 이익이 무엇이었을까요? 그리고 저런 사례들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는지도 부연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2. 지나가다가 2009.04.06 15:59 신고

    회손이 아니라 훼손입니다.

  3. neo 2009.04.06 18:51 신고

    일제강점기, 일제와 친일파들에 의해 이루어졌을 재판과 그 재판기록에 근거해서, 그것도 <일부>의 사례를 들어 설을 펴다니 발표한 천 모라는 이가 실없어 보이네요.

  4. 여울 2009.04.06 19:12 신고

    광주사태나, 80년대의 운동도 분석해보면 비슷한 분석이 되지 않을까요?
    적극가담자의 지식과 단순가담자의 무의식적 합류가 될터이니까요

  5. 어멍 2009.04.10 11:16 신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역사는 (승자든 패자든) 기록하는 자의 기록이다.
    역사는 역사 자신의 것이다.

    재밌고 유익한 자료와 말씀 감사합니다.

  6. 동대문도서관 2010.07.27 15:54 신고

    안녕하세요- 동대문도서관 입니다.
    『근대의 책 읽기』 저자 천정환 교수님의 강좌 <독자, 그들의 대한민국 - 근현대 문학과 독자의 문화사>가 9월 7일부터 매주 화요일 7시에 동대문도서관에서 열립니다.

    자세한 사항은 아래 링크를 통해 확인해주세요. ^^
    http://blog.daum.net/pangloss/6940293

윤봉길 의사

유명한 한인애국단 입단식 사진

윤봉길 의사가 도시락 폭탁을 던저서 상하이 홍구 공원에서의 일본 전승행사를 쑥대밭으로 만든 사건은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유명한 사건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거기까지가 아는 지식의 끝인게 현실이다.

문득 도시락 폭탄의 실체가 궁금해져서 그내용을 찾아 보고 포스팅해본다. 유명한 사건이지만 대부분 실제 내용은 잘 모르는게 현실이니 말이다.

상해에서 야채장사를 하던 윤의사가 홍구 공원에서 거사를 결행하기 까지는 정치적 군사적 배경(색계(色戒) 실제 역사속의 인물과 그 이야기 1부)이 있다. 훗날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영화화 되는 날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늘 그렇듣이 글이 삼천포로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 도시락 폭탄에만 집중 해본다.









의거 3일전 거행한 한인애국단 선서문(위 사진에서 목에 걸고 있는 내용)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대한민국 14년 4월 26일 선서인 윤봉길.”



폭탄은 누가 어디서 만들었는가?
상해 강남 조선소 내에 있는 병공창에서 물통 모양과 도시락 모양으로 만들어서 무료로 20여개를 제공 받았다. 이봉창 의사의 거사가 폭탄 성능 미비로 실패했던 만큼 수차례의 사전 성능 시험을 거쳤다고 한다.

이를 병공창측에서 차로 주임 김홍일의 집으로 운반해주고 다시 김구 선생이 교포들 집에 분산 은익했다. (폭탄인줄 주인도 모르게 귀한 약이니 불조심 하라는 말과 함께 분산 시켰다고 한다. 보안도 중요했지만 좀 무섭다.)

폭탄 투척
흔히 도시락 폭탄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투척된 폭탄이 도시락 폭탄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사용된 폭탄은 수통(물병) 모양 폭탄이었다. 식장에는 수통 모양과 도시락 모양 폭탄을 각각 들고 들어갔지만 거사 직전에
거사직후 윤봉길의사

거사직후 연행되는

가지고 있던 도시락 폭탄은 땅에 내려 놓고 수통 폭탄의 덮개를 벗겨 안전핀을 뽑으면서 당산을 향해서 2미터 가량 돌진해서 폭탄을 던지게 된다.

1932년 7월 당시 일본 내무성 문서에 따르면 크기는 성인 남성 손바닥만하고 타원형에 어깨에 멜 수 있는 가죽끈이 달려있다고 한다. 하얀 헝겁으로 폭탄 전체를 감쌓아서 영락없는 수통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크기가 좀 큰 수류탄이었다.

도시락 폭탄에 대해서는 자폭용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모양은 평범한 각진 알루미늄 도시락에 천으로 싼형태에 발화 끈이 나와 있는 형태이다.



<유촉시(遺囑詩)>
청년제군들에게

피 끓는 청년제군들은 아는가 모르는가.
무궁화 삼천리 내 강산에
왜놈이 왜 와서 왜 광분하는가.

피 끓는 청년제군들은 모르는가.
되놈이 되 와서 되가는데
왜놈은 와서 왜 아니가나.

피 끓는 청년제군들은 잠자는가.
동천에 여명은 밝아지려 하는데
조용한 아침이나 광풍이 일어날 듯

피 끓는 청년 제군들아 준비하세.
군복 입고 총 메고 칼 들면서
군악 나팔에 발맞추어 행진하세




  1. 2009.10.26 20:46

    비밀댓글입니다

  2. 고등학생 2010.08.06 22:30 신고

    우연히 윤봉길의사의 도시락폭탄이 생각나서 검색해봤는데
    다시한번 그분의 애국심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좋은하루되세요~

  3. 공부하는사람 2011.09.23 11:28 신고

    근데요..마지막에 저 사진은 일본이 조작한 사진이라도 얼마전 티비에서 방영했답니다.. 윤봉길의사는 폭탄을 투척 후 처참하게 일본군에게 구타당했다고 전해지고요..저런 왜소한 몸집에 저 얼굴은 누가봐도 윤봉길의사의 사진과눈 다르죠...조작된 사진이라고합디다.

    • 공부하는사람 2011.09.24 16:28 신고

      텔미님..네 그럴 수 있어요. 다 좋습니다만,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텔미님 눈에는 사진 속 저분이 윤봉길의사님으로 보이십이까...?사진자체가 얼굴을 분간하기 어렵지만 제 눈엔 아무리 봐도 아닌거 같습니다..

  4. 초등학생이라 무시하지마세요 2013.07.27 10:19 신고

    저 밑에 있는 사진이 진짜인지는 모르겠네요. 위에 있는 분처럼 조작 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본래 윤봉길 의사의 사진과 다른 얼굴 형태인 것 같아, 조작이라 예상 되네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되세요^^

연제를 처음 시작하면서 부터 꺼림찍 한 면이 있었다. 짦은 지식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게 옳은가 하는 점과 남의 집안에 대해서 왈가부가 비하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가지 사항이었다. 사실 족보만 전문으로 다루면서 생활을 하시는 전문가 분들이 아직도 많이 있다. 그 분들이 이글을 읽으면 무어라고 할지 모르겠다.
이 글을 계기로 자기 성씨의 유례를 다시 한번 돌아보고 실제 역사와 비교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여기서는 차마 언급못한 꽤 재미있는 사실들을 찾아 낼 수 있을 것이다.

족보 속의 거짓 말

3부 연제로 이야기를 끝내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족보를 보면서 느끼는 가장 특이한 점은 뭐였습니까? 사실 족보가 입고 없고 상관 없이 인터넷 검색만 조금 해봐도 느끼는 문제지만 족보의 가장 흔한 거짓말은 중국에서 왔다는 중국 시조설입니다. 이걸 진짜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조상은 대다수가 중국에 선조가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도 있고 또 다른 사람들은 이게 모화주의 즉 중국에 대한 사대사상 탓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상을 알고 보면 그런 이유가 아닙니다. 족보를 만들 당시의 자존심 문제 때문에 조상들이 중국에 뿌리를 두는 거짓말이 시작된 것일 뿐입니다. 대부분의 족보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 사이에 만들어 지게 됩니다. 고려 때의 귀족이 아닌 조선을 건국하는 신흥 양반들이 필요에 따라서 족보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한가지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새로 만들어진 족보에서는 윗대의 조상이 나올 수가 없다는 점 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신생족보다라고 말하고 싶은 집안이 어디 있겠습니까? 따라서 윗대가 안 나오는 뿌리깊은 족보를 만들 필요성이 있었고 가장 손 쉬운 방법이 바로 선조가 중국에서 왔다는 시조를 내세우는 방법을 사용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경향이 지나치게 심해서 중국의 상고사까지 시조를 올려 버리는 경우가 있었고 이는 가문 내에서도 지나친 감이 있다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기에 이를 부정하고 추적 가능한 시조까지만 주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족보를 살펴 보면 이런 부분이 쉽게 보이는데 보통 시조에서 고려 때까지의 족보가 얼버무려지고 이후 고려조부터(보통은 고려말)의 실질적인 인물들이 나오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대부분 본관이 고려조에 형성되게 되고 이때가 실질적인 족보의 시작인 경우가 많습니다.  보통 이 시기에 처음 파도 갈리기 시작한다. 무슨 뜻이냐 하면 족보를 만들던 시점에서 실제 알 수 있던 윗대가 저 시점이라는 것이다.

고대 왕을 시조로 하는 왕성(김이박)의 경우를 보면 또 다른 특징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삼국시대 역대 왕들이 있었음에도 특정 왕을 시조로 하는 후손들 만이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지나치게 숫자가 많지요.

여기서 족보에 대한 실질적인 문헌상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족보는 고려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것으로 고려 의종(18, 1146~1170)때 김관의(金寬毅)가 지은 『왕대종록(王代宗錄)』이 처음이다. 그러나『고려사』를 보면 고려 때에도 양반 귀족은 그 씨족계보를 기록하는 것을 중요시하였고, 제도적으로 종부시(宗簿寺)에서 족속의 보첩을 관장했다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귀족 사이에는 계보를 기록 보존하는 일이 실제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사대부 집안에서 사적으로 간행되기 시작하였으나, 1476(조선 성종7)의 『안동권씨 성화보(安東權氏 成化譜)』가 체계적인 족보 형태를 갖춘 최초의 족보이다. 이후 1565(조선 명종20)에는 『문화유씨 가정보(文化柳氏 嘉靖譜)』가 혈족 전부를 망라하여 간행되면서 이를 표본으로 하여 명문세족에서 앞을 다투어 족보를 간행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7세기 이후 여러 가문으로부터 족보가 쏟아져 나오게 되었으며 대부분의 족보가 이 때 만들어 지기 시작했다.

 

조선 초기에 간행된 족보의 대부분은 족보간행을 위해 초안을 하고 관계 자료를 충실히 보완한 뒤 간행에 착수하여 내용에 하자가 없었다. 그러나 이후의 족보들은 초안이나 관계 자료의 검토, 고증도 없이 자의적으로 기록하여 간행된 것이 많았다. 그리하여 자의적인 수식이 가하여 졌음은 물론이며 조상을 극단적으로 미화하고, 선대의 벼슬을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조작하고, 심지어 명문 집안의 족보를 사고 팔거나 훔치는 경우도 있었다. 뿐만아니라 사대주의 사상에 젖어 시조의 유래를 중국에 두어 기자(기원전 1122년 우리나라에 왔다고 함)를 따라 우리나라에 왔다고 하거나, 중국의 인물을 고증도 없이 조상 이라고 하는 식으로 족보를 꾸미기도 하였다.

 

위의 내용을 보고 의문을 표하는 분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고려조의 귀족 가문은 기록을 했으니 오랜 족보가 있을 거라고 하지만 실제로 현존하는 고려 귀족 성씨의 족보를 보면 그 때의 기록은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족보에는 너무 많은 거짓이 포함되는 것이다. 따라서 조상에 대한 진실을 알고 싶다면 성이나 족보에 의지하기 보다는 자신의 3대조의 실질적 내용을 아는 게 중요하다.

여기서 성에 대해서 집고 넘어가야 하는데 조선초기까지도 성이 없는 사람이 80%가량이었다고 한다. 성은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어 왔지만 성이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왕이 성을 하사하기도 했고 왕조가 무너질 때는 쉽게 자신의 성을 만들거나 바꿀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시점에서 필요에 따라서 자신의 성을 선택한 조상이 있었다는 사실을 쉽게 유추해 볼 수 있다. 이와 관련된 진실을 알고 싶다면야 유전자 조사를 통해서 쉽게 추적할 수 있지만 우리 특성상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된다. 특정 성씨에 몇 명의 시조(아버지)가 있고 언제 적 사람인지 알아 낼 수 있는 과학적 기술은 아주 일반적이기 때문에 차후에 유전관련 질병 검사가 널리 보급되는 시점에는 의료적 문제로 조사를 하게 되겠지만 말이다. 시재에 참석하는 사람들 유전자만 조사해도 쉽게 알 수 있지만 아마 당장하고 싶어하는 가문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족보의 가짜 여부를 확인한다는 것은 고려조 이후 족보가 완전하게 구축된 이후에 편입된 경우를 가짜 족보라고 말해야 한다.

개족보

개족보라는 말을 들어봤나? 견종의 족보라고 오해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남의 집안 족보를 비하할 때 사용하는 말이 저 개족보라는 말이다. 보통은 조작된 엉터리 족보라는 뜻이된다. 족보가 진짜인지를 확인하는 가장 기본은 본관지역에 어느 선조가 거주하였는가를 알면된다. 농업국가의 특징은 땅에서 벗어나서 사는 경우가 아주 드물기 때문이다. 서울에 올라와서 사는 경우에도 결국은 토지가 있는 고향에 기반을 두게 되는데 그건 다른 생존 수단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요즘 사극 드라마에서는 상업적 기반을 가지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만 우리 역사의 대부분의 기간에 그런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봐야 한다. (특히 족보와 관련되는 양반들은 말이다.)

이런 사실은 당시 선조들이 더 명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짜 족보에 대해서는 적당한 변명거리가 들어가게 된다. 유배라던가 전란 같은 죽고 사는 종류의 사유가 보통 사용된다.  다르게 보면 저런 종류의 큰 사건이 아니면 지역을 멀리 벗어나지 않는 다는 것을 반증하기도 한다.

따라서 자신이 현재 알 수 있는 3대조 이상의 선조 거주지를 알면 자신의 집안에 대한 진짜 내력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실은 그냥 생존하는 어른께 여쭈어보면 진실을 알 수도 있겠지만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물론 상업이나 기술관료 같은 집안이 있겠지만 그 비율은 너무나도 적기 때문에 각자 알아보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일본은 아직도 천민이 존재한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일본은 아직도 부라쿠민이라는 천민계층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고 있다 신분제가 철폐되고 세상이 이렇게 변했는데도 어떻게 그럴 수 있으며 우리는 주변을 아무리 찾아봐도 백정집안은 찾을 수가 없는데 말이다.

우리 사회에 더 이상 백정 차별이 없는 이유는 6.25전쟁 덕분이다. 마을을 떠나서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신분으로 정착할 수 있는 기회를 줬기 때문이다. 앞의 연제에서 언급했지만 일제시대까지도 백정에 대한 차별은 극심했고 이런 상황은 당시 신문에 보도될 정도로 큰 사건으로 번지기도 했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학교 운동회에 백정 여자들이 참가했다는 이유로 옷을 벗기고 재갈을 물리고 말 몰이를 하는 차별이 할아버지 세대에 있었다는 것이 상상이 안되겠지만 말이다.

따라서 형평사운동같은 백정들의 신분차별 폐지 운동까지 있을 정도였다. 그런 차별이 6.25전란을 통해서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것이다. 임진왜란이후 조선 사회가 변했던 것과 같은 이유다.

하지만 전쟁을 격었지만 마을을 떠날 일은 없었던 일본은 그 신분에 대한 흔적이 계속 남아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문제이다. 우리나라 시골에서도 어른들은 저 집안은 머슴집안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모습을 지금도 볼 수 있다.

조상의 신분을 현재에 바라보는 시각

워낙 민감한 부분이기 때문에 언론이나 공식적인 매체에서는 다룰 수 없는 이야기를 마구 다뤄봤는데 이제 마무리를 겸해서 당부의 이야기를 해야겠다.

빼대 있는 양반 집안이나 천민 백정집안이라고 현대에 와서 자부심을 같거나 비하 당할 이유는 전혀 없다. 왜냐하면 결국은 우리 모두는 같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에서 선조가 나오는 시점까지 올라가지 않더라도 우리의 조상이 되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렇게 숫자가 많지 않다는 사실이 근간의 유전자 추적 연구의 결론이 되었다.

결국 우리 모두는 형제 자매 사이의 관계라는 것이다. 족보 자랑하고 조상의 신분 자랑해봤자 너와 나는 똑 같은 부모의 자식일 뿐이니까 말이다.

이 포스팅은 그저 족보나 성씨의 진실을 알고 넘어가자는 의미 이상도 이하도 없다.

  1. 음... 2010.08.09 20:16 신고

    글 잘 쓰셨네요. 잘읽고갑니다.

  2. 나그네 2013.10.07 15:09 신고

    저는 백정집안 후손입니다. 항시 화를 자제하며 살기가 올라오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3. 리얼리스트 2013.12.16 13:35 신고

    양반 천민 차별과 6.25이후 민주주의에 비판은 아닙니다만 급격한 산업화까지 겪으면서 한국사회 노블리스는 붕괴되었지요 결국 금권주의 국가 천민평준화 곧 천민시대 붕괴가 예상되는데 정작 문제의 천민들은 주제를 모르니 걱정이군요

    • 텔미 tellmegame 2014.01.17 10:27 신고

      ? 대한민국 사회에도 문제는 많지만 다른 나라 생활을 직접 보시면 대한민국 정도면 살기 좋은 나라 됐구나 하고 생각하실텐데 싶습니다.

      그리고 웃자고 하는 천민이라면 모르겠지만 정말 천민이라는 말을 쓴다면 그 말 쓰는 사람이 천민이라고 생각합니다.

1부를 포스팅하자 마자 유입검색어에 [백정 성씨]라는 키워드가 바로 떳다. 2부는 이문제를 중심으로 이야기해본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전설의 진실과 거짓 그 배경을 이야기해본다.

왕족 성씨이니 당연히 양반이다.

나는 양반성인 김이박이라서 당연히 양반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는 아주 흔하고 일반적인 생각이다. 임진왜란 이후에 많은 사람이 돈으로 족보를 사고 팔고 했다는 이야기도 많이들 들어봤을 것이다. 그리고 1909년 일제가 호적을 줄 때는 거성(흔한 성 즉 김이박최 등)으로 대거 편입됐다. 당시에 성이 없던 천민은 자신이 원하는 성을 모두 인정해서 성을 기록했다고 한다. 물론 이전에도 성은 필요에 따라서 바뀌기도 하고 임의로 지어서 사용하기도 했다. 임의로 가질 때는 가장 흔한 성씨가 가장 손쉬웠을 것이라는 건 쉽게 추정해볼 수 있다. 안 그랬다면 지금보다도 훨씬 다양한 성씨가 존재했을 테니 말이다.

성씨 본관별 인구

본으로 하니까 김이박이 아니네..

1909년 당시에 일제가 호적제도를 만들면서 두 가지 괴담이 생겨났다.

첫 번째는 천방지축마골피는 천민성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일제의 호적 정리과정에서 성을 맘대로 정하게 한 것은 식민통치의 일환이었다.
 
천방지축마골피는 천민의 성인가?

개인적으로도 저렇게 알고 있던 시절이 있었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저런 말을 정설로 알고 있는 게 현실이다. 심지어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 조차도 저런 잘못된 지식(구전되는)을 함부로 공공연하게 말함으로써 어린 학생들에게 상처를 주고 잘못된 지식을 널리 퍼트리기 까지 하고 있다. 재발 선생님들은 확인된 지식 아니면 함부로 말하지 말자……

천방지축마골피라는 말의 진실은 다음과 같다.

천방지축마골피는千方池秋馬葛()皮라는 성씨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天方地丑馬骨皮라는 말로 조선시대에 천대 받던 직업 목록을 뜻하는 것이다.

하늘천-            무당업

본뜰방-            목수업

땅지-               지관업

소축/추할추 -丑  소백정업

말마 -            말백정업

뼈골-              뼈백정업

가죽피-           가죽백정업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의 대표적인 천업인 백정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푸른색 글씨는 통칭해서 백정이라고 말하는 직업이다. 백정을 소 도축하는 직업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상 특정 계층(달단)을 이야기하고 그들의 주요 종사 업종에 도축업이 포함된 것이다. 참고로 가죽백정은 가죽 제품을 만드는 사람 바로 갓바치이다. 또 고리백정(고리백장)은 고리 버들로 키나 고리짝을 만드는 직업이다.

 대표적 천민인 백정으로 유명한 임꺽정의 성이 임()인 것을 봐도 단순히 성만으로 천민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임경업장군도 성이 임꺽정과 같은 임(林)이다. 여기서 상식적으로 알아두면 흥미로운 점은 재인백정(광대와 백정)은 여진족에 속하는 (타타르인 한자로 달단(韃靼))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고려말기 처음 그들이 유입되고 조선전기에 아직까지 혈통이 보존되던 시절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말이다.

 백정이 노비와 동급의 천민이 된 이면에는 이런 속사정도 있다. 생김새와 말이 전혀 달랐으니 그 구분과 차별이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물론 농사에 중요한 자원인 소나 말을 도살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시대적 특성도 포함해서 말이다. 너무 나아가면 주제를 벗어 날게 분명한 만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1909년의 자유로운 성의 선택은 식민지배 책동인가?

1909년에 일제가 실시한 호적정리 과정에서 천민들에게 자유롭게 양반성씨를 가질 수 있게 한 것은 씨족별 단결을 방해하고 수탈의 대상을 늘리기 위한 식민지 책동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그건 일본 사정을 모르고 너무 일제 식민통치에 대한 피해의식적인 시각이라고 하겠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일본에도 신분제도가 있었고 특히 부라쿠민으로 칭해지는 지금도 차별을 받고 있다는 천민 계급을 평등한 근대적인 사상으로 해방시켰던 개혁적인 모습을 똑같이 조선에도 적용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좋게 말하면 평등 사상을 동일하게 적용한 거고 나쁘게 말하면 식민 통치하기 위해서 통일된 평등제도를 적용한 것이다

지금도 일본에는 성을 가지고 부라쿠민을 구별 한다는 속설이 일본에 있다고 하는데 우리의 천방지축 이야기와 비슷하다. 다만 기존 성으로 편입이 없이 독자적인 성을 선택했다면 실제로 구분이 가능 하리라고 생각된다. 먼저 실시해서 상황을 아는 일본이 새로운 성을 만들어 쓰게 할리는 없었다는 것이다. 계속 차별이 가해질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일제 시대동안에는 형평사운동(일본 부라쿠민이 스이헤이샤(水平社,수평사)를 했다)을 해야할 만큼 신분차별은 계속됐다. 운동회에서 벌어진 백정 집안 여자들에 대한 학대같은 예는 지금 관점에서 보면 상상이 안간다. 이쯤에서 분명히 해둘 것은 천민확인이 이 포스팅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문화 가정이 늘어나는 현실에서  최소한 조작된 신화가 아닌 조상에 대한 진실을 알고 가자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아프리카에서 온 단일 조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잘난 조상 타령으로 아옹다옹할 필요는 없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일단 거성에 속한다고 해서 실제로 그 성씨라는 보장은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도 동감하리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문제는 성이 대중적으로 사용하면서 발생한 문제였기 때문에 같은 성씨라도 좀더 구분하는 본관이라는 제도가 있고 좀 따지는 어른들은 꼭 본관을 확인하게 됩니다. 유명한 한남동 라씨 같은 경우를 보면 기존 나씨와는 전혀 다른 성이라는 것을 본관을 들어야만 구별이 가능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단순한 본관 구분만으로도 문제가 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족보인데...... 그럼 조심스러운 족보이야기는 다음편에서 계속 해보겠다.

  1. ㅁㄴㅇㄹ 2010.02.10 15:29 신고

    좋은 글이네요 그런데 타타르족은 몽골족에 속합니다.

  2. 슈게이저 2010.08.02 22:15 신고

    일본도 근대화 과정에서 국민들에게 성씨를 마음대로 짓게 했습니다. 그때 일어났던 소동들과, 웃지못할 이야기들도 책으로 나와있지요.

  3. ASD 2013.07.28 22:39 신고

    임꺽정은 당시 산에 무리를지어 생활하였기때문에 생모가 나무의 이름을 본따 수풀림 자를 사용했습니다.

  4. 2014.07.06 15:51 신고

    운동회에서 무슨일이 일어났길레... 어디서 찾아볼수있나요?

    • 텔미 tellmegame 2014.10.22 17:30 신고

      백정 말타고 달리기 또는 백정 각시 타기로 검색하시면 내용을 찾아 보실 수 있습니다.

      요즘 기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백정 각시 놀이라는 식으로 무지 막지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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