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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 100주년으로 뉴스마다 여러 가지 보도가 되는데 그 후손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너무 한가지 목적으로 포장을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들 안중생은 후일 이토 히로부미 사당에 참회의 절을 하고 그 아들에게 울며 사죄하고 양자를 자청했다고 합니다. 그 대라고 약국을 차리고 자식은 미국 유학을 가고 그런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 김구선생은 안중생의 암살을 지시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실행은 되지 않았지만 참 비극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찾아보는 와중에 안중근의사의 큰딸의 수기가 보여서 인용합니다. 기가 봐서 마찬가지로 제가 있었던 니다.

 

아들의 변절에는 집에 먹을게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는 변절이니 친일이니 하는 비난은 아래 수기를 봐서라도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안중근의사의 의거와 그 후손이야기가 포장이 아니고 사실대로 솔직하게 다뤄졌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아래 수기는 1956년 실화라는 잡지 4월호에 실렸던 큰딸의 글이라고 합니다.

 

거사 후에 우리 가족이 더듬어온 길

세상 떠나신 선친에 대해서 여러분이 쓰신 글들을 많이 보았습니다만 저 자신이 붓을 들기는 이것이 처음입니다. 이렇게 청을 받고 붓을 드니 하고 싶은 말도 많고 머리 위에 떠오르는 지난 일도 많습니다만 무엇으로부터 말을 시작해야 좋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생각나는 대로 대충 적어보기로 하겠습니다. 선친이 돌아가신 것은 지금으로부터 46년 전 326일이었습니다.

그때 제 나이 여덟 살이고 보니 큰 기억이라고는 있을 수 없었습니다만 자라면서 조모님을 비롯하여 여러 선생님으로부터 말씀을 들었습니다. 원래 저의 집 고향은 황해도였습니다만 조부모님 때부터 진남포(鎭南浦)에서 살았습니다. 선친께서는 일찍이 집을 떠나 망명길에 나섰고 숙부 한 분은 서울법정학교에 다녔고 한 분은 진남포에서 일찍이 선친이 창설한 학교 교원으로 있었습니다.

이리하여 어머님과 어린 동생은 조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만 선친께서는 의거하신 해에 노령(露領·러시아 영토) '버그라니스'에 살림을 장만했으니 온 집안 식구더러 오시라고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그러나 살림살이로 보든지 식구로 보든지 솔가할 수는 없었지요. 그래서 조모님 말씀이 비록 망명길을 떠나기는 했으나 가족이 그리울 것이며 그날그날이 적적할 테니 저의 어머님과 어린애들만이라도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장녀로 태어나 조모님의 지극한 귀여움을 받아오던 저까지 보내면 쓸쓸하셔서 견딜 수 없다고 저만은 조모님께 남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조모님의 말씀대로 어머니는 어린 동생을 데리고 길을 떠났습니다. 딱딱한 사회적 환경과 딱딱한 집안 분위기에서 자란 어머니는 이때 처음으로 기차를 타시게 되었고 처음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던 장옷을 벗고 구두를 신었습니다. 이와 같이 여장(旅裝)을 꾸미시고 집을 떠나 기차가 장춘(長春·당시 新京)에 이르렀을 때 정거장에는 총을 메고 칼을 찬 헌병이나 경찰을 비롯하여 유달리 일반 사람이 흥성대고 있었답니다.

그래서 처음 길 떠난 어머니도 의아스럽게 생각하였지만 주위 사람들도 저마다 의아스럽게 보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이등박문(伊謄搏文)의 시체를 실은 기차가 마주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와 같은 중대한 사건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하얼빈에 도착하여 선친이 연락하신 대로 그곳 김성백(金聖佰)씨 집을 찾아갔습니다. 한데 김성백씨를 비롯하여 집안사람들이 조금도 반가워하는 기색이 없을뿐더러 거의 무표정하게 아무런 말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는 이라고는 한 분도 없는 하얼빈이라 어머니는 그래도 그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그곳에 선친하고 함께 계시던 모씨가 들어오더니 선친께서 이등박문을 죽였다는 소식을 전함으로서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그분 말씀이 곧 일본 경찰이 잡으러 올 텐데 절대로 안중근의 아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주셨습니다. 그분 말대로 얼마 후 말소리 요란스럽게 일본 경찰이 와서는 어머니와 어린것을 잡아갔습니다.

어머니로서는 객지에 나선 것도 이것이 처음이요 경찰서에 가보기도 처음이었습니다. 일본 경찰은 선친과 ×××씨의 사진을 내보이면서 잘 알지 않느냐 하고 묻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순간 어머니는 선친의 사진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한쪽에 밀어내고 모씨는 오빠 되는 분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이처럼 고집해도 이미 알아낸 일본 경찰은 "안중근의 아내인 줄 알고 있는데 왜 거짓말을 하는 거야" 하면서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끝내 부인하자 그들은 어머니와 어린 것을 유치장에 가두었습니다.

평소 어떻게 생겼는지 생각조차 해본 일이 없는 어두컴컴한 유치장에서 어머니는 어린 동생보고 울라고 시켰습니다. 아마 그렇게 하면 시끄러워서라도 곧 내보내리라 믿었는지 모르지요. 그것은 어쨌든 어린 동생이 자꾸 울기만 하자 일본 경찰은 나오라고 하면서 다시 조사를 계속하는데 그때 어머니는 어린 동생보고 이젠 울지 말라고 하니 "엄마, 아까는 울라고 하더니 왜 이젠 울지 말라고 해요" 이렇게 말하였고 이것을 들은 일본 경찰은 또다시 욕설을 퍼부었답니다. 결국 어머니는 3일 동안 유치장 생활을 하시다가 나왔습니다. 어머니의 외로웠을 심정은 누구든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요. 그 후 선친이 의거하신 소식이 널리 알려지자 이곳저곳에 흩어졌던 여러분들이 하얼빈에 모이기 시작했고 그분들의 주선으로 선친이 마련하신 버그라니스에서 고독한 살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李王의 밀사라고 모계(謀計)하는 일본 경찰

한편 일본 경찰은 진남포 저희 집을 수색하고 서울에서 공부하시는 숙부도 조사하고 야단이었지요. 일이 이렇게 되니 저의 집안사람들이 국내에서 마음 편히 살수는 없는지라 조모님, 숙부님 모두 조국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낮에는 여관에 묵고 밤이면 걸어서 함경도-만주로 해서 노령인 버그라니스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다시 동청철도(東淸鐵道) 연변에 있는 목릉에 집을 옮겼습니다. 그 후 한 사람 두 사람 숙부님의 가족도 한곳에 모이게 되었고 그리하여 그곳에서 우리 집안사람들이 살게 되었는데 그곳을 지나오고 지나가는 혁명가 분들은 꼭 들러서 위로해주곤 했습니다.

한편 선친의 의거에 대해서 말하면 일찍이 의용군(義勇軍)을 조직하고 두만강에서 일본 사람과 접전(接戰)하시던 선친은 다시 해삼위(海蔘威·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지들과 함께 의거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등박문이 온다는 소식을 듣자 구체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동지의 한 분인 우덕순(禹德順)씨는 본래 은방을 한 경험이 있는지라 총알도 몸에 박히면 한층 괴로움을 당하도록 모가 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하얼빈까지의 지리를 따져 우덕순씨, 유동하(柳東夏)씨 그리고 선친 세 분이 세 곳에 대기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우덕순씨도 그와 같은 의거의 기회를 만나지 못했고 유동하씨도 그러했습니다. 그리하여 마지막 기회인 하얼빈에서 선친이 이등을 죽였지요.

선친은 이등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와 같이 동지들과 계획을 세운 다음 소련에서 자라 소련말 중국말에 능통한 유동하씨와 함께 하얼빈에 도착해서는 위에서 말한 바 있는 김성백씨 집에 투숙하였습니다. 그리하여 20일 가까이 대기하고 계시다가 마침 1026! 그날이 왔습니다. 이등을 맞이하기 위해서 소련의 고관들도 많이 나왔고 경비도 준엄했습니다만 선친께서는 용의주도하게 이등 가까이까지 뚫고 들어가셨습니다. 그리하여 총을 뽑기 시작했는데 이에 앞서 해삼위에서 동지들과 약속하기를 이등에게는 총 세 발을 발사할 것, 그렇게 함으로서 절명(絶命)을 보장할 수 있으며 나머지 총탄도 주의해서 발사하되 소련 사람이 맞을 경우 국제적인 문제도 있으니 주위에 있는 일본 고관에게 발사하기로 했답니다.

그래서 선친께서 이등을 향해 일 발을 발사했으나 워낙 군악(軍樂)소리가 요란스러웠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은 총소리를 듣지 못했고 이 발을 발사하자 그때 비로소 주위 사람들이 총소리를 알아듣기는 했으나 순간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답니다. 삼 발을 발사하자 이등은 땅에 쓰러지고 선친은 계속해서 주위에 있는 일본 고관들에게 난사(亂射)하여 팔에 맞은 놈, 머리가 깨지는 놈이 속출했답니다. 이제 뜻했던 바 일에 성공하신 선친은 권총을 내던지고는 바로 그 장소에서 "대한민국 만세"를 힘 있게 외쳤지요. 이리하여 일본 경찰은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는 선친을 마차에 실어 여순구(旅順口)에 이송하였습니다.

취조가 시작되었으나 선친께서 자기의 일거일동을 명백히 하는지라 고문할 필요도 없었고 길게 조사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의 모계(謀計)를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선친더러 목숨을 살려줄 테니 공판정에서 이왕(李王)의 명을 받고 이등을 죽였다고 진술할 것을 강요한 것입니다. 이때 선친께서는 "목숨을 아낄 내가 아니요, 그렇게 목숨을 아끼는 나라면 이런 중대한 일을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천부당만부당한 말을 그만두고 빨리 사형해 달라고 했습니다. 선친의 태도가 그와 같이 확고하니 일본 경찰도 그와 같은 그들의 계획을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
나라를 찾거든 고국에 묻어달라!"고 유언

그리고 일본 경찰도 선친께 대해서는 극진한 대우로서 음식은 요구하는 대로 제공했답니다. 의거하신 1026일에서 사형당하시던 다음 해 326일까지의 만 5개월 동안 추운 형무소 생활을 계속하신 선친의 고생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겠지요.

선친께서 사형언도를 받자 그때 서울에 와 있던 프랑스인 홍() 신부님은 선친의 마지막 길에 '연미사'를 올리고 유언을 듣기 위해서 여순구로 왔습니다. 그러나 정식으로 주교(主敎)의 승낙을 얻을 수 없는 일이어서 홍 신부님은 주교에게 비밀에 부치고 개인적으로 그것을 행했기 때문에 나중에 신부 자격을 잃게 되었지요. 즉 홍 신부님은 선친을 위해서 희생된 것인데 그 후 홍 신부님은 비록 신부의 자격은 잃었어도 고국에 가서 그대로 신부의 복장을 하시고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계속했답니다.

사형을 집행하기 전에 홍 신부님이 연미사를 올리고 마지막 유언을 들을 때에는 저의 숙부 두 분도 참석하였습니다. 선친의 유언은 간단했지요. "나라를 찾거든 나의 시체를 고국에 묻어달라"라는 한마디였습니다. 그들은 326일 오전 10시 정각에 정기장치로 사형을 집행했고 그때 숙부님 두 분이 일본 경찰에게 시체를 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만 일본 경찰은 이를 거절하면서 숙부님을 밖으로 떠밀어냈습니다.

숙부님 두 분은 워낙 어리신 때라 눈물이 앞을 가로막아 그대로 여관에 돌아가 밤새 붙잡고 울기만 했답니다. 아침에 배달되는 신문을 보고 선친을 ××에 매장한 것을 알게 되었지요. 한편 선친의 의거가 있기 전에 제정 러시아에서는 교포 7만명을 노령으로부터 퇴거(退去)하도록 명령을 내린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친의 의거가 있자 한국에 이와 같이 훌륭한 분도 있느냐고 하면서 퇴거명령을 철회했을 뿐만 아니라 좋은 땅을 제공하기까지 했답니다. 또한 저희들을 감격하게 한 것은 해마다 선친이 돌아가신 327일이면 중국 사람을 비롯한 외국 사람들까지도 그 묘지를 찾아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일본 사람들도 그날이면 분향을 했습니다. 얼마 전 향항(香港.홍콩)을 거쳐 중국에서 돌아 온 사람이 전하는바 지금도 그 묘지를 찾아주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8
·15 해방이 되면서 선친의 유언대로 고국에 모시려고 했습니다만 국제정세가 미료했던 관계로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셋째 숙부님은 일찍이 중국에서 세상을 떠나시고 둘째 숙부님은 "형님이 그렇게 유언하셨는데 어찌 나만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느냐"라고 하시면서 고국에 돌아올 것을 거부하고 국제정세가 좋아지면 선친의 유언대로 선친을 모시고 고국에 돌아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 공산당이 정권을 잡게 되었고 숙부님은 상해와 대만을 오고가고 하시다가 중국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편 제가 고국으로 돌아온 것은 해방된 다음해 1111일이었습니다. 이렇게 늦게 돌아오게 된 것은 물론 선친을 모셔야 한다는 데도 이유가 있었지만 다른 돌발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해방 당시 중국 상해에 우리 교포 몇 천명이 살고 있었는데 주인(남편)이 한교민단(韓僑民團) 단장으로서 일을 보아오다가 그해 124일 나쁜 사람들로부터 저격을 당해 세상을 떠나게 된 불행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주인의 유골을 모시고 돌아와야 하였기 때문에 그처럼 늦게 돌아오게 되었지요.

두 딸과 함께 고국에 돌아온 저는 당장 의지하고 찾아갈 곳이 없었습니다. 오직 있다면 제가 어릴 때 약 4년간 불란서 '까이리' 수녀님과 지낸 일이 있어 그 계통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명동 성모병원으로 갔더니 마침 정()의례시나 수녀님이 저를 알아보고 고맙게 대해주셨습니다. 수녀님은 추운 날씨라 제 손을 잡고 자기 입김을 불어주시면서 방으로 안내하였습니다. 그곳에 우선 짐을 맡겨두었지요. 상해에 있을 때 듣기에 입을 옷이며 가구가 귀하다고 하기에 중요한 것만 꾸려 가족 가방 다섯 개와 보통 짐 다섯 개로 만들어 수녀님 댁에 보관시킨 거지요.

조국을 찾은 첫날에 당한 지능적 사기!

한데 고국에 돌아오자 또다시 예기치 않았던 불행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상해를 떠날 때 저와 딸 둘로 여자들만이라 이웃사람의 소개로 어떤 청년과 같이 오게 되었습니다. 그 청년은 짐을 꾸릴 때에도 거들어준다고 하면서 어느 속에 무엇이 들고 어느 속에는 어떠한 것이 들어 있다는 것을 저만큼 알고 있었지요. 그리하여 함께 돌아와 성모병원까지도 같이 왔었고 저는 짐을 그곳에 맡겨두고는 아는 사람들을 찾기 위해서 밖으로 나왔지요.

다음 날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 수녀님을 찾고 그 뜻을 말했더니 짐을 둔 방문을 열어주셨습니다. 한데 가방 다섯 개가 눈에 띄지 않기에 제 생각으로는 수녀님께서도 가방 다섯 개만은 중요한 것이 들었으리라 믿고 자기 방에다 따로 보관했으리라 믿었지요. 그래서 "수녀님, 가방은 방에다 보관하셨군요"라고 한마디 하자 순간 수녀님은 매우 당황한 표정이 되어 잠시 말이 없었습니다. 다음 순간 말씀하기를 전날 저와 그 청년이 나간 지 한 시간 후 청년은 다시 돌아와서 지금 호텔 방을 하나 얻고 당분간 그곳에 투숙하기로 되었기 때문에 제가 시켜서 왔다고 하면서 가방 다섯 개를 갖고 갔다는 것입니다.

실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수중에 돈은 없고 이제 입을 옷까지 잃었으니 앞으로 어떻게 하나 생각해봐야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 청년은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한 일이라 다시 찾을 수도 없으리라 단념하고 우리 세 모녀는 막연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지요. 한데 고마웠던 것은 이() 신부님이 신학교 기숙사 방 하나를 빌려주셨습니다. 비록 다다미방이기는 했으나 의지할 곳 없는 우리 모녀에는 사랑스러운 보금자리였지요.

이제 방은 얻었으나 먹을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정의례시나 수녀님의 소개로 금강전구주식회사 사장인 박정근(朴定根)씨를 방문하고 그곳에서 생산되는 전구로 장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이와 같이 장사하기로 이야기는 됐습니다만 우선 전구를 100개 받아오려면 낡은 전구 100개를 가지고 가야 하는데 제 주위에서는 그것을 구할 도리가 없었지요.

이것 역시 교회 안에서 모아가지고 전구를 받아서 팔기 시작했습니다. 이집 저집, 이 가게 저 가게 찾아다녔지만 그리 잘 팔리는 장사도 못될뿐더러 아는 사람을 만날까봐 퍽 어색했습니다. 그러나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다소 익숙해지기도 했고 밥 세끼를 먹을 만한 최소 한도의 수입은 있었습니다. 전구 하나를 팔면 20전이 이익으로 남았고 그리하여 하루 이삼백원 수입으로 세 식구는 그날그날을 보냈지요. 그러나 전구가 제대로 생산되면 100개건 200개건 받을 수 있었으나 생산이 제대로 되지 못할 때에는 최소한의 수입마저 끊어지는 날도 있었습니다. 더구나 전구를 잘못 받아 오면 몇 개씩 손해를 보게 되는지라 공장에서 하나하나 시험을 해가면서 100 200개를 받는 수고는 그때가 추운 겨울이라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최소한의 생활도 다시 풍파를 만나게 되었으니, 그것은 학교에서 기숙사를 수리하여 학교에서 써야 하는지라 저와 같이 방을 얻어 쓰고 있던 몇 사람은 부득이 방을 비워야 했습니다. 이와 같이 방은 꼭 비워드려야 했으나 우리 세 모녀는 당장에 갈 곳이 없었지요. 그래서 저는 며칠을 두고 생각했답니다. 누구를 찾아가면 꼭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하고 이 사람 저 사람을 머리 위에 그려보면서 하나하나 판단을 내렸지요.

그러던 끝에 선친을 잘 아시고 저와도 중국에서 학교 시절 가까이 지냈던 주모씨를 방문하고 사정 이야기를 했더니 그분이 그때 돈으로 적지 않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선 안국동에 방 하나를 얻고 나머지 돈을 밑천으로 해서 우리 모녀의 살림을 확립하기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김모씨의 말이 된장, 간장을 받아서 군부에 납품하면 생활은 유지할 수 있다기에 그 사람 말대로 안국동에 '안생공사(安生公司)'라는 간판을 걸고 그 사람과 함께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또다시 사기당하는 온정의 거금


그것이 1947 7월이었습니다. 한데 그 김모씨는 장사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고국 사정에 어두운 저를 속이고 장사밑천으로 고스란히 사복을 채웠지요. 속았다는 괘씸한 생각은 물론이거니와 주씨로부터 얻은 그 적지 않은 돈을 이렇게 헛되게 없애버린 미안스러운 생각이 앞서 몹시 괴로웠습니다. 이제 또다시 생활이 곤란한 데다가 방세도 다시 내야 할 텐데 제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다시 어는 누구를 찾아 동정을 바랄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울히 지내는 어느 날 저의 사정을 잘 아는 신모씨가 퍽 동정하시면서 8군단에서 지은 후생주택 하나를 주선하여 주셨습니다. 그것이 지금 살고 있는 집이지요. 서울시에 가서 집 열쇠를 받아들고 우리 세 모녀는 너무도 기뻐서 손을 마주잡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제 좋든 나쁘든 집은 장만이 되고 남은 것은 먹고살아 나갈 생활방도였습니다.

그 당시 저는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 민정장관(民政長官) 안재홍씨도 방문하고 경무부장 조병옥씨도 방문하였던바 조병옥씨 말씀이 모자 무두 경무부에 나와서 일을 하면 어떠냐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의 만류도 있고 해서 양자로 있는 사람을 경위(警衛)로 취직시켰습니다. 다만 이러니 저러니 해서 두 달인가 석 달 후에야 비로소 발령을 받았지요.

근무는 인천이라 추운 겨울날 북아현동 산 밑에서 새벽 일찍이 출근하여 밤늦게야 돌아오고 그렇게 지내다가 마침내는 폐가 나빠서 신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그 수입으로 근근이 살아오기는 했으나 여순반란사건 때 전투대에 참가하여 부상을 입고는 병상에 눕게 되었지요. 이래서 생활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참혹했습니다. () 여사가 때때로 쌀을 갖다 주셨고 찬값도 이삼천원씩 주셨습니다.

그러다가 그때 신한공사(新韓公司) 총재로 계시던 C씨가 영등포에 있는 땅 천평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돼지를 치고 집에서는 닭을 쳤습니다. 이것이 6.25 직전까지 돼지 서른다섯 마리, 닭 백 마리가량으로 늘었습니다. 6·25동란을 맞이하여 양자 되는 사람이 경찰이라 해서 영등포에 있는 돼지는 그들이 죄다 가져갔습니다.

집에 있던 닭은 파편을 맞아 죽기도하고 나머지는 생활이 궁할 때라 잡아먹기도 하고 이러하여 모두 없어졌지요. 6·25 때 공산당 사람들이 여러 차례 찾아오기는 했으나 양자는 병으로 누워 있고 집안 살림도 말씀이 아닌지라 별반 해롭게 굴지는 않았습니다. 더구나 9.28수복 때 제가 살고 있는 북아현동이 최전선이 되어 이웃집들은 적지 않게 피해를 입었습니다만 저희 집 장독대와 우물에는 파편 하나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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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후퇴 때 양자는 끝내 세상을 떠나고 저와 딸 둘은 대구에 내려가 저는 천주교에서 세운 효성여자대학에서 불문학을 가르쳤습니다. 대구시장께서 쌀 배급을 주셔서 그럭저럭 생활은 유지되었고 큰딸은 육군중령으로 있는 지금의 사위와 결혼을 하였지요. 제가 효성대학에 나가다가 하루는 얼음판에서 넘어져 절골을 당하고 그때 혈압이 230으로 고혈압에 몹시 신음한 바 있었는데 지금도 그 병세 때문에 적지 않은 괴로움에 잠겨 있습니다.

이렇게 모진 고생을 하면서도 저는 늘 선친의 교훈을 잊지 않습니다. 고생하고는 모진 고생이기도 하지만 선친에 비한다면 이것이 무슨 고생이 될까 자탄하면서 지내왔습니다. 서울로 돌아올 때에는 그곳 학생들이 모아둔 고마운 전별금도 있었고 그리하여 다시 옛집으로 들어왔습니다.

안중근 의사를 역이용하는 사람들?

생활은 사위 몫으로 배급 나오는 쌀로 그럭저럭 유지해왔고 해가고 있습니다. 둘째딸은 리더스다이제스트 사에 근무하여 집안 살림도 조금씩 도우면서 저금을 계속해오다가 이제 시집갈 나이가 되었으나 좀 더 공부를 해야 한다고 지난 120로스앤젤레스로 떠났습니다.

서울에 돌아왔어도 생활 때문에 네다섯 명의 개인교수도 했으나 혈압이 자꾸 높아가고 그래서 그것도 그만두었지요. 다만 집주위에 꽃을 재배하는 것을 일삼고 그날그날을 보내왔습니다. 앞으로 저의 오직 하나 큰 희망은 선친의 유언대로 선친을 고국으로 모셔오는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이와 같은 국제정세에서는 당분간 어려우리라 생각되어 퍽 마음이 괴롭습니다.

또한 제가 불쾌하게 생각하는 것은 선친의 이름을 이용하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안중근 의사의 어떻게 되는 사람이요" 하면서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불미한 일을 하고 있다는 풍문을 허다히 듣고 있습니다. 풍문만이 아리나 실제 만나본 일도 있습니다.

지난번에 '안희자'라는 여성이 저를 찾아와서는 언니라고 하면서 자기도 선친의 따님이라고 해요. 그래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습니까! 저는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딸은 저 혼자뿐이라고 간단히 대답해 주었지요. 그랬더니 그 사람 말이 자기는 어릴 때부터 홀로 객지에 나왔기 때문에 기억이 확실치는 않으나 그렇다면 질녀가 되는지도 모른다고 엉뚱한 말을 하지 않아요. 그래 질녀가 있기는 해도 이미 세상 사람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안미생, 안련생 두 사람밖에 없어요.

또 자기가 일본에서 자랐다고 하기에 그럼 일본 어디서 자랐느냐고 물었더니 기억할 수 없다고 대답해요. 우리 집안사람은 일본에 갈 리도 없고 갈 수도 없다는 것은 누구든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에요. 저는 길게 말할 흥미조차 없어 저를 찾아온 목적이 뭐냐고 했더니 태연스럽게도 다음과 같이 말하는 거예요. 지금 땅도 얻게 되고 그리하여 학교를 짓고 저를 교장으로 모시겠는데 다만 필요한 것은 자기가 선친의 따님 혹은 질녀가 된다는 것을 증명해달라고 하지 않아요. 세상이 혼란하기로서니 이런 일이야 어찌 꾸며질 수 있겠습니까. 저는 다시는 찾아오지도 말라고 하면서 돌려보냈지요.

평소 하고 싶은 말도 많았고 느낀 바도 않았던지라 두서없는 말 길게 늘어놓은 것 같습니다. 저는 하루바삐 선친을 고국에 모실 수 있는 그날이 돌아오기를 빌면서 끝을 맺습니다.




이 기록은 이전 3.1운동에 관련된 학술발표 포스팅에 이어서 실례를 보기 위해서 찾은 자료입니다. 출처 등은 글 말미에 첨부합니다. 딱딱한 법정기록인 만큼 읽는 편의를 위해서 제 생각은 기록 안에 넣어서 간단히 읽고 싶은 분들의 요구를 만족시키려고 합니다.

 

 


대정 8년 형공(刑控) 513

 

3.1운동이 있던 1919 (大正 : 다이쇼) 재판입니다. 다음 동일 사건으로 재판 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나열 됩니다. 피고의 이름을 보시면 무슨 사건의 재판인지 알게 됩니다.

 

   

충청남도 천안군 동면 용두리(東面龍頭里)

농업 조인원(趙仁元)

56

동도 동군 수신면 복다회리(卜多會里)

농업 김상훈(金相勳)

46

동도 동군 동면 용두리 

학생 유관순(柳寬順)

18

 

너무나 유명한 이름이지요. 18세의 유관순열사 바로 아우내장터 만세사건으로 체포된 유관순과 그 마을 사람들의 재판 기록입니다. 재판 기록에도 수천명의 사람이 참가했다고 나오지만 실제 재판에 회부된 사람은 이 분들입니다. 이후에는 존칭없이 유관순으로 칭하겠습니다.

 

동도 동군 동면 동리

교사 유중무(柳重武)

45

동도 동군 수신면 발산리(修身面鉢山里)

농업 김용이(金用伊)

24

동도 동군 동면 용두리 

농업 조병호(趙炳鎬)

21

동도 동군 수신면 복다회리 

농업 백정운(白正云)

24

동도 동군 동면 동리   

농업 신 씨( )  

67

동도 동군 동면 용두리

농업 조만형(趙萬衡) 

21

동도 동군 갈전면 병천리

농업 박제석(朴濟奭)  

19

동도 동군 동면 동리

이발업 박봉래(朴鳳來)

27

 

 위의 11명에 대한 소요 및 보안법위반 피고 사건에 대해 대정 8 5 9일 공주지방법원이 언도한 유죄판결에 대해 피고 11명으로부터 공소 신립이 있었으므로 당 법원은 조선총독부 검사 수야중공 관여로 다음과 같이 심리 판결한다.

 

많은 사람이 참여했던 사건으로 이미 공주 지방법원에서 판결을 받고 다시 경성 복심원으로 항고한 11명의 최종 판결문이다. 그리고 판결문 원본은 당연히 일어로 되어 있는 문서입니다.


위키의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 요약은 다음과 같습니다.
  • 일시:1919년 4월 1일(음력 3월 1일)
  • 장소:천안 아우내 장터
  • 경과:천안 아우내 만세운동은 성공회 병천교회에서 운영하던 진명학교 교사 김구응이 지역 유지들과 젊은 청년, 학생들과 함께 준비한 만세운동이다. 독립선언문을 발표한 김구응과 그 모친 최씨가 총탄에 맞아 즉사했으며, 유관순을 포함한 많은 참가자들이 부상, 투옥등의 어려움을 겪었다.

 


                 

 

원 판결 가운데 피고 조인원, 김상훈, 유관순, 유중무, 김용이, 조병호, 백정운, 조만형, 박제석에 대한 부분 및 피고 신씨에 대한 유죄부분을 취소한다.

피고 조인원, 유관순, 유중무를 징역 3년에 처하고, 피고 김용이, 조병호를 징역 2 6월에 처하며, 피고 김상훈, 백정운을 징역 1 6월에 처하며, 피고 조만형, 박제석을 징역 8월에 처한다.

피고 신씨, 김상훈, 백정운, 조만형, 박제석에 대한 소요 공소사실은 무죄를 언도한다. 피고 박봉래의 공소는 이를 기각한다. 압수물건 가운데 영 제 1호 구한국 국기 한 자루는 이를 몰수하고 여타는 소유자에게 환부한다.

 

이 서류가 발견되기 까지 유관순이 받은 형량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있었으며 재판장에서 의자를 집어 던졌다는 전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해졌던 7, 5년 보다는 작은 3년 형을 최종적으로 언도 받았습니다. 참고로 공주 지방법원에서는 5년형을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형량과 비교해보면 가장 무거운 형량 그룹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특이점은 이전 포스팅 내용을 연상할 수 있는 부분으로 소요 부분에 대해서 무죄를 언도 받은 5명과 공소 기각되는 이발업의 박봉래라는 분입니다. 막연하게 가지고 있던 상황과는 좀 다른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1. 피고 유관순은 재 경성( 京城) 이화학당(梨花學堂) 생도인바 대정 8 3 1일 경성에서 손병희 등이 조선 독립 선언을 발표하고 단체를 만들어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며 각처를 행진하며 독립 시위운동을 벌이고 있음을 보고 동월 13일 귀향하여 4 1일 충청남도 천안군 갈전면 병천(竝川) 시장 장날을 이용하여 조선 독립 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꾀하고 자택에서 태극기(구 한국 국기 압수 영 제1)를 만들어 이를 휴대하고 동일 하오 1시경 동 시장으로 나아가 그곳에서 수천명의 군중 단체에 참가하여 전시 태극기를 휘두르며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고 독립 시위운동을 감행하여 치안을 방해하였고 피고 유중무·김용이·백정운·박제석·조만형·김상훈·조인원·조병호·박봉래는 동년 4 1일 하오 1시경 전시 병천시장에 나가 다수 군중 단체에 참가하여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며 독립 시위운동을 감행함으로써 치안을 방해하였다.

 

유관순이 주모자이며 핵심인물 임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여러 장의 태극기중에 유관순이 사용한 태극기가 가장 크고 아름다웠던 거 같습니다. 남아있다면 문화재 지정감일텐데...

이후의 내용을 보면 당시의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2. 전시(前示) 피고 등이 이와 같이 독립 시위운동을 하자 그곳에서 약 50보 거리의 철천 헌병주재소 헌병이 이를 제지하려 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으매 발포하여 다수의 사상자(死傷者)를 냈으며 피고 유관순의 부()이며 유중무의 형인 유중권(柳重權)도 그 피해자의 한 사람인바 피고 유중무 및 군중은 그 피해자를 둘러매고 주재소로 몰려가 피고 유중무·유관순·김용이·조인원·조병호는 군중에 솔선하여, 유중무는 두루마기의 끈을 풀러 대성격노(大聲激怒)하여 헌병의 목을 졸라 매려고 하였고 또 그형인 피해자를 동 주재소 사무실로 넣으려 하자 이를 제지하려는 헌병 보조원 맹성호(孟星鎬)에 대해너는 보조원을 몇십년 하겠느냐? 때려 죽이겠다고 하였고 피고 유관순은 동 주재소장을 잡아 나꿔채며 항의하였고 피고 김용이는 헌병에게 투석하고 동 주재소 보조원 정수영(鄭壽永)에 대해조선 사람이면서 무엇 때문에 왜놈의 헌병 보조원을 하느냐? 죽여 버리라고 호통치며 주전자를 그의 가슴에 던졌고 피고 조인원은 상의(上衣)를 벗어 동 주재소장 및 헌병들의 총을 나꿔채며 그 아들인 조병호는 전시 헌병 상등병의 뺨을 때리고 협박했으며 군중은 동 주재소원의 총에 달려들어 탄약합(彈藥盒)을 잡아떼며 또는 소장을 죽이라고 외쳐 소란을 피웠다.

 

당시의 상황이 좀더 명확하게 보이는 내용입니다. 그 중 눈에 뜨이는 부분은 유관순의 아버지가 주재소 헌병의 총검에 사망하자 흥분한 사람들이 주재소로 처들어 갔다는 부분입니다. 상황 묘사가 상당히 자세해서 유관순의 작은 아버지가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이후에 주재소측 근무자 시각의 진술도 있기 때문에 흥미롭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아버지의 시신을 모시고 주재소로 처들어 가 주재소 소장을 멱살을 잡고 항의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새롭게 느껴집니다. 더욱이 무장하고 있는 헌병들이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보이네요.

 

 

  1의 사실은 당 법정에서의 피고 유관순·유중무·김용이·박제석·조만형·김상훈·조병호·박봉래의 각각 판시사실과 동일한 요지의 공술 및 피고 백정운·조인원의자기들은 대정 8 3 1일 이후 조선 각지에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는 독립 시위운동이 일어나고 있음에 자기들은 병천 시장에 나가서 군중 시위운동을 구경하고 있었다는 요지의 진술과 원심공판 시말서 중 피고 유관순의압수 영 제 1호의 구 한국 국기는 자기가 만들었다는 진술, 동 피고 백정운의자기는 김상훈이 태극기를 건네 주어 그것으로 만세를 불렀다는 진술과 사법 경찰관의 조인원에 대한 신문조서 가운데자기는 유중무·유중권 및 자기 아들 조병호와 함께 태극기를 앞세우고 자기가 큰 소리로 만세를 불렀다는 요지의 공술 기재를 종합하여 이를 인정하며,

 

소요죄 부분에 무죄를 받은 분들은 자신들은 그저 시위를 구경하다 건네준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불렀다고 진술하는 군요.

재판 결과를 보면 주동은 아니지만 적극 가담자라는 분류를 받은거 같습니다.

 

  2의 사실은 당 법정에서의 피고 유관순은병천 시장에서 만세를 부르고 있을때 헌병 주재소와는 약 50보 거리였는데 헌병이 쫓아와 군중을 향해 발포하고 총검을 휘둘러 즉사 19명 중상자 30명을 내었고 자기 부친도 살해되었는데 헌병이 군중에게 발포하려고 총을 겨누었을때 자기는 쌍방을 제지키 위해 헌병의 총에 달려 들었다고 진술하고 있고, 동 유중무는주재소 헌병이 군중의 행동을 제지하려고 했으나 군중이 이에 응하지 않아 부득이 발포하여 군중 가운데 사자(死者) 2명이 생겼으며 이에 격분한 군중은 시체를 주재소로 밀어 넣었고 자기는 형 유중권이 헌병에게 총검으로 옆구리 및 머리를 찔려 빈사 상태에 빠지자 형을 업고 주재소로 가 치료를 달라고 요구했다는 요지의 공술을 하였고,


 

막연하게 알던 일제시대의 분위기와는 다른 내용들이 들어있네요. 주재소로 가 형(유관순의 아버지)의 치료를 요구했다니 재판 과정에서 필요에 의한 진술인지 진짜 였는지 모르겠습니다.

 

 동 김용이는자기는 주재소로 몰려가 만세를 외쳤다는 진술을 했으며 동 조병호는자기는 조인원의 아들이라는 공술을 했으며 원심공판 시말서 가운데서 조인원의헌병의 발포로 자기는 좌흉부(左胸部)를 맞았고 왼팔을 총검으로 찔리웠고 또한 사망자 2명이 발생하매 그 시체를 메어 주재소로 갔었다는 공술과 검사의 조병호에 대한 신문조서 가운데만세를 외치자 헌병들이 발포하여 일단 피했었고 군중이 주재소로 몰려갔으나 헌병이 시체를 밖으로 내어 던졌다는 요지의 공술 및 사법 경찰관의 김용이에 대한 신분조서 가운데서자기는 헌병에게 한번 투석했고 그 손을 잡아 당기며 병기(兵器)에 손을 댄 일이 있다는 요지의 공술과 원심공판 시말서 가운데서 피고 유관순은만세를 부른 다음 주재소로 가자 부친이 죽어 있었기 때문에 격분하여제 나라를 되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했는데 어째서 군기(軍器)를 사용하여 내 민족을 죽이느냐고 대어들다 헌병이 총을 겨누기에 죽음을 당할까 보아 그 가슴에 달려들었다는 요지의 공술과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이 보이는거 같습니다. 다음의 내용을 보면 주재소 헌병의 입장에서 바라본 만세운동의 모습이 보입니다. 또한 발포 책임자도 명확하게 나옵니다.

아래 내용 중에 18세의 여자 유관순이 소장의 멱살을 쥐고 휘저었다고 나오는데 당시 유관순은 키가 170Cm정도 였다고 한다. 당시로써는 거구인 유관순에게 잡힌 일본인 소장 꼴이 참 아니었을거 같다.

 

검사의 헌병 상등병 진 상부( 相部)에 대한 조서 가운데자기는 철천 헌병주재소 재근(在勤)인 헌병인데 판시 일시, 병천 장날 하오 1시 경 만세를 외치며 군중이 대한 국기를 선두에 세우고 몰려왔기 때문에 해산을 명했으나 응하지 않아 기총(騎銃)을 발포한즉 일단 물러갔으나 그 뒤 이 발포로 말미암아 유관순의 부친과 남씨(南氏)의 남편이 사망하였다고 하여 약 40명의 군중이 그 시체를 메고 주재소로 다시 몰려와 무엇인가 떠들기에 주재소원 너댓 명이 밖으로 달려 나오자 1 5백 명 이상의 군중은 주재소로 몰려오고 있었고 소원 5명은 주재소 앞에 정렬하여 있을 때 유리창이 깨졌으며 그로부터 자기들은 사무소 입구 왼쪽 벽에 병렬(竝列)했는데, 군중은 자기들 5명이 소지한 기총에 달려들어 탄약합을 잡아당기고 소장을 죽이라고 외치며 소장을 끌어 내려하여 권총을 몇 번 발사한즉 군중은 다시 도망쳤는데 그 가운데 피고 유중무는 두루마기의 끈을 풀어 고함을 지르며 헌병을 잡고 조르려는 기세를 보였고 조인원은 처음 시체를 밀어 넣을 때 시체와 함께 들어서서 상의를 벗고 소장의 총에 달려드는가 하면 또한 자기의 총에도 달라 붙었고 유관순은 소장의 착의(着衣)에 달라 혈흔이 부착해 있음을 가리키며 군중에게 무엇인가 외치고 소장의 멱살을 쥐고 휘저었고 조인원의 아들은 자기의 뺨을 한번 때리더라는 요지의 공술

 

다음은 우리가 흔히 친일파 앞잡이의 대표적 존재라고 알고 있는 헌병 보조원의 진술이 나옵니다.

 

기재 및 사법 경찰관의 헌병 보조원 맹성호에 대한 신문조서 가운데대정 8 4 1일 피고 유중무는 그의 형이 장터에서 헌병에 의해 중상을 입었다하여 형을 업고 주재소로 들어오려고 하기에 제지하자 그는 자기들에 대해너희는 몇십년이나 보조원을 하겠느냐? 때려 죽이겠다고 하며 치고 김용이는 자기들에 대해어째서 왜놈들과 함께 일하는 보조원 노릇을 하느냐? 함께 만세를 부르라. 그렇지 않으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이라고 호통을 치더라는 요지의 공술 및 동 보조원정 수영에 대한 신문조서 가운데판시 일시 철천 시장에서 군중이 독립만세를 외치고 있음에 소산(小山) 주재소장 외 4명은 자기와 맹성호에 대해 장터로 출동하니 주재소 사무소를 발포 준비를 하고 있으라 명하고 떠났으나 잠시 후 총성이 들려 왔으며 이윽고 유중무와 김용이는 군중과 함께 부상자를 주재소로 업고와 주재소로 넣으려 하기에 문을 닫자 김용이는 자기들에 대해조선 사람이면서 무엇하느냐? 몇십년 보조원을 해먹을 생각이냐? ‘죽여버리겠다고 하기에 부상자에게 더운 물을 주라고 하며 주전자를 내어 주자 이 따위 물을 마실 수 있느냐고 자기에게 주전자를 집어 던져 가슴을 얻어 맞았다는 요지의 공술 기재를 종합하건대 이상의 사실을 인정한다.

 

당시 헌병 보조원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이 보이네요.

 

 법에 비추어 피고 유관순·유중무·조인원·김용이·백정운·박제석·조만형·김상훈·조병호·박봉래의 제1의 소위는 범죄 후의 법령에 의해 형의 변경이 있었으므로 형법 제8·6조에 따라 신·구 양법을 비교하여 그 가벼운 바를 적용할 것이매 신법에 의하면 대정8년 제령 제7호 제1조 제1항에 해당하며 구법에 따르면 각각 보안법 제7·조선 형사령 제42조에 해당하는 바 형법 제 10보에 따라 각각 구법이 가벼운 바 이의 법조문을 적용코 징역형을 선택, 피고 유관순·유중무·김용이·조인원·조병호의 제2의 소위는 각각 형법 제106조 제2호에 해당되며 징역형을 선택하고 동 피고 등은 형법 제45조에 따라 병합죄임에 동법 제47·10조에 따라 무거운 제2의 죄에 파형할 것으로 동법 제47조 단서의 가중형이 타당하다고 보아 피고 유관순·유중무·조인원을 각각 징역 3년에 처하고 피고 김용이·조병호를 각각 징역 2 6월에 처하며 피고 김상훈·백정운을 징역 1년에, 피고 조만형·박제석을 각각 징역 8월에,피고 박봉래를 징역 6월에 처한다. 피고 김상훈·백정운·신씨가 판시 제2의 소요죄에 가담하여 피고 조만형·박제석이 동소요에 가세(加勢)하고 또는 부화수행(附和隨行)하였다는 공소사실은 이를 인정할만한 증빙이 불충분한바 동 피고 등에 대해서는 형사 소송법 제258조 제 1, 236·224조에 따라 각각 무죄를 언도한다.


 압수물건 중 구 한국 국기 한 자루는 피고 유관순 소유의 제 1범죄 공용물이므로 형법 제19조 제1항 제 2·2항에 따라 이를 몰수하고 여타는 형사소송법 제 202조에 따라 일체 소유자에게 환부한다.

 원판결에 있어 피고 신씨에 대한 소요 공소사실은 그 증거가 충분타고 보아 유죄판결을 했고 피고 김상훈·백정운·조만형·박제석에 대해 소요 공소 사실을 그 증거가 충분타고 인정하여 판시 치안방해 죄와 병합죄로 처단했고 또한 피고 유관순·유중무·김용이·조인원·조병호에 대한 형의 양정(量定)은 과중하여 타당치 않으매 동 피고 등의 공소는 각각 이유있고 피고 박 봉래에 대해 판시 사실을 인정하여 판시 법조문을 적용하고 징역 6월을 선고했음은 타당한 바 동 피고의 공소는 이유 없으므로 동법 제261조에 따라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대정 8 6 30

                                    경성 복심법원 형사부 재판장

                                    조선총독부 판사 총원 우태랑


본 문서는 유관순기념관 자료이며 유관순은 저 판결로 3년형을 언도 받지만 이후 대사면령으로 형이 1/2으로 감형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유관순은 출소 이틀전에 사망하고 만다.

  1. 어멍 2009.04.16 11:50 신고

    치안방해죄, 소요죄, 보안법(현 국가보안법의 모법)...하며 어렵지만 익숙한 법률용어와 문법하며...일제와 지금이 본질에서 얼마나 다르며 우리는 얼마나 이를 극복했는지...헌병보조원 맹성호와 그의 자손들, 당시 법원법률관계에 종사했던 한국인들은 이후 삶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많은 생각이 드네요. 민중은 가장 낮은 곳에 있지만 그들이 내는 힘은 가장 순수하고 강력하지요.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최근 3.1운동 90주년 국내전문가 집중토론회에서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내용이 발표되었다. 워낙 불편한 내용이라서 그런지 널리 보도되지는 않은거 같다.

이런 내용을 애써서 외면하려는 분들도 있고 또는 발표 자체를 매도하는 분도 있다. 뭐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불편하지는 않다. 왜 불편해하는 것일까?

3.1운동은 피지배계급을 역사의 주체로 등장시키고 이는 민주 공화정의 디딤돌이된 근대화 운동이자 민족운동이라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옥중의 유관순누나

17살의 유관순 투옥 사진


이런 해석만을 듣던 사람들이 다른 이야기를 듣게되자 상당히 불편한 해지는 것이 사람 마음이라고 하겠다.

마치 짝사랑하는 순이가 설사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느끼는 혼란된 마음 같다고 해야할까?

이번에 발표된 불편한 이야기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성균관대 천정환 교수는 20일 성균관대 600주년기념관에서 열린 ’3.1운동 90주년기념 국내전문가 집중토론회’에서 발제문 ’소문(所聞)ㆍ방문(訪問)ㆍ신문(新聞)ㆍ격문(檄文): 3.1운동 시기의 미디어와 주체성’을 통해 3.1운동 당시 일부 지식인들이 무식했던 일반 민중에게 시위에 참가하라고 협박한 사실을 주목했다. 그는 당시 재판 기록을 보면 기소된 피고인 중 ’무식자’(無識者)들은 “’유식자’의 선동에 의해 (시위에) 참가했다고 진술”했으며, 유식자들의 선동은 때로 “’만세를 안 부르면 밟아 죽인다’, ’집을 불태워버리겠다’는 협박에 기초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천 교수는 “협박은 주로 마을의 ’유지’ 등 식자층에 의해 행해진 것으로, 그 대상은 특히 ’무식한’ 민중이었다 할 수 있다”고 덧붙이면서 “정치적 무책임의 세계에 살던 민중은 아직 ’민족’으로도 ’민중’으로도 형성돼 있지 않았던 건 아닐까?”라고 조심스럽게 ’3.1운동의 민중 탄생’ 담론을 반박했다.

천 교수는 이 같은 사실들이 “거대한 적과 맞서야 하는 ’운동’의 조급함이 언제나 불러일으키는 ’잡음’ 같은 것”으로 간주할 수 있겠지만 “협박은 연대나 접속이 아니라 무조건 동원 또는 탈접속”이라는 점에서 3.1운동을 통해 민중이 탄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에둘러 지적했다.

천 교수는 또 최남선이 작성한 ’기미독립선언서’와 관련, “추상적인 내용과 극도로 현학적이며 고식적인 문체, 그리고 완벽한(?) 한주국종(漢主國從) 표기법”으로 이뤄졌다고 설명하면서 “이 선언서로 과연 어떻게 민중을 조직할 수 있었을까”라고 의문을 제기했

저런 이야기는 널리 알고 있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가 짝사랑하는 순이는 착하고 이쁘지만 화장실에 가서 볼 일도 봐야되는 바로 내옆의 사람이라는 걸 알아야만 사랑 고백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관순 졸업 사진

1918년 3월 말 즉 윗 사진의 1년전


기실 우리는 3.1운동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독립선언문, 유관순누나, 아우내 장터 하지만 저 인용문에 나오는 '무식자'즉 문맹 또는 무학력인 이들이 어떤 과정으로 생각으로 만세운동에 동참했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볼 필요는 분명히 있다. (생각을 해보면 꼭 저런 협박이 있어야 되는건 아니다. 단순한 일제에 대한 반감만으로도 쉽게 선동 될 수도 있기 때문이고 재판과정에서는 죄를 회피하기 위해서 저런 변명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널리 알고 있는 프랑스 대혁명에서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혁명의 업적이자 상징처럼 널리 알려진)해서 구출해낸 사람은 단지 7명이었으며 그들은 정치 사상범이 어니었으며 구출된 대표적인 인물이 싸디즘으로 유명한 야설의 아버지 사드 남작이었다는 거짓말 같은 진실 말이다. . 개인적으로 사드의 소설을 흥미있어 하지만 그가 거기서 구출된 사실에 그닥 기쁜 감정은 들지 않는다..

그토록 프랑스가 자랑하는 프랑스혁명에는 불편한 진실들이 가득 들어있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은 그런 사실들도 널리 알고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그런 사소한 내용들이 프랑스 대혁명의 가치를 훼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찮가지로 3.1운동이나 독립운동의 불편한 진실들이 있다고 해서 그 근본적인 가치는 훼손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오히려 모든 진실을 알아야만 그 가치를 더욱 진실되게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 폭탄은 무슨 도시락인가?

+ 발표 내용을 직접 본다면 좀더 자세한 이야기가 있었겠지요. 저 인용에서는 독립운동의 조급함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만 이해관계는 다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7살의 유관순이 왜 고향까지 내려가서 아우내의 거사를 치루었느냐 같은걸 생각해 보자는 뜻에서 유관순 누나(영원한...)의 사진을 삽입했습니다.
두번째 사진속의 유관순과 동무들을 보면 피상적으로 생각하던 유관순 보다 좀더 많은 생각을 해볼 수 있지 않습니까? 
  1. 미리내 2009.04.06 15:46 신고

    불편한 진실도 당연히 밝혀져야 하겠지요. 하지만 소위 유식자들이 무식자들을 겁박해서 얻은 이익이 무엇이었을까요? 그리고 저런 사례들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는지도 부연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2. 지나가다가 2009.04.06 15:59 신고

    회손이 아니라 훼손입니다.

  3. neo 2009.04.06 18:51 신고

    일제강점기, 일제와 친일파들에 의해 이루어졌을 재판과 그 재판기록에 근거해서, 그것도 <일부>의 사례를 들어 설을 펴다니 발표한 천 모라는 이가 실없어 보이네요.

  4. 여울 2009.04.06 19:12 신고

    광주사태나, 80년대의 운동도 분석해보면 비슷한 분석이 되지 않을까요?
    적극가담자의 지식과 단순가담자의 무의식적 합류가 될터이니까요

  5. 어멍 2009.04.10 11:16 신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역사는 (승자든 패자든) 기록하는 자의 기록이다.
    역사는 역사 자신의 것이다.

    재밌고 유익한 자료와 말씀 감사합니다.

  6. 동대문도서관 2010.07.27 15:54 신고

    안녕하세요- 동대문도서관 입니다.
    『근대의 책 읽기』 저자 천정환 교수님의 강좌 <독자, 그들의 대한민국 - 근현대 문학과 독자의 문화사>가 9월 7일부터 매주 화요일 7시에 동대문도서관에서 열립니다.

    자세한 사항은 아래 링크를 통해 확인해주세요. ^^
    http://blog.daum.net/pangloss/6940293

윤봉길 의사

유명한 한인애국단 입단식 사진

윤봉길 의사가 도시락 폭탁을 던저서 상하이 홍구 공원에서의 일본 전승행사를 쑥대밭으로 만든 사건은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유명한 사건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거기까지가 아는 지식의 끝인게 현실이다.

문득 도시락 폭탄의 실체가 궁금해져서 그내용을 찾아 보고 포스팅해본다. 유명한 사건이지만 대부분 실제 내용은 잘 모르는게 현실이니 말이다.

상해에서 야채장사를 하던 윤의사가 홍구 공원에서 거사를 결행하기 까지는 정치적 군사적 배경(색계(色戒) 실제 역사속의 인물과 그 이야기 1부)이 있다. 훗날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영화화 되는 날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늘 그렇듣이 글이 삼천포로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 도시락 폭탄에만 집중 해본다.









의거 3일전 거행한 한인애국단 선서문(위 사진에서 목에 걸고 있는 내용)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대한민국 14년 4월 26일 선서인 윤봉길.”



폭탄은 누가 어디서 만들었는가?
상해 강남 조선소 내에 있는 병공창에서 물통 모양과 도시락 모양으로 만들어서 무료로 20여개를 제공 받았다. 이봉창 의사의 거사가 폭탄 성능 미비로 실패했던 만큼 수차례의 사전 성능 시험을 거쳤다고 한다.

이를 병공창측에서 차로 주임 김홍일의 집으로 운반해주고 다시 김구 선생이 교포들 집에 분산 은익했다. (폭탄인줄 주인도 모르게 귀한 약이니 불조심 하라는 말과 함께 분산 시켰다고 한다. 보안도 중요했지만 좀 무섭다.)

폭탄 투척
흔히 도시락 폭탄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투척된 폭탄이 도시락 폭탄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사용된 폭탄은 수통(물병) 모양 폭탄이었다. 식장에는 수통 모양과 도시락 모양 폭탄을 각각 들고 들어갔지만 거사 직전에
거사직후 윤봉길의사

거사직후 연행되는

가지고 있던 도시락 폭탄은 땅에 내려 놓고 수통 폭탄의 덮개를 벗겨 안전핀을 뽑으면서 당산을 향해서 2미터 가량 돌진해서 폭탄을 던지게 된다.

1932년 7월 당시 일본 내무성 문서에 따르면 크기는 성인 남성 손바닥만하고 타원형에 어깨에 멜 수 있는 가죽끈이 달려있다고 한다. 하얀 헝겁으로 폭탄 전체를 감쌓아서 영락없는 수통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크기가 좀 큰 수류탄이었다.

도시락 폭탄에 대해서는 자폭용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모양은 평범한 각진 알루미늄 도시락에 천으로 싼형태에 발화 끈이 나와 있는 형태이다.



<유촉시(遺囑詩)>
청년제군들에게

피 끓는 청년제군들은 아는가 모르는가.
무궁화 삼천리 내 강산에
왜놈이 왜 와서 왜 광분하는가.

피 끓는 청년제군들은 모르는가.
되놈이 되 와서 되가는데
왜놈은 와서 왜 아니가나.

피 끓는 청년제군들은 잠자는가.
동천에 여명은 밝아지려 하는데
조용한 아침이나 광풍이 일어날 듯

피 끓는 청년 제군들아 준비하세.
군복 입고 총 메고 칼 들면서
군악 나팔에 발맞추어 행진하세




  1. 2009.10.26 20:46

    비밀댓글입니다

  2. 고등학생 2010.08.06 22:30 신고

    우연히 윤봉길의사의 도시락폭탄이 생각나서 검색해봤는데
    다시한번 그분의 애국심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좋은하루되세요~

  3. 공부하는사람 2011.09.23 11:28 신고

    근데요..마지막에 저 사진은 일본이 조작한 사진이라도 얼마전 티비에서 방영했답니다.. 윤봉길의사는 폭탄을 투척 후 처참하게 일본군에게 구타당했다고 전해지고요..저런 왜소한 몸집에 저 얼굴은 누가봐도 윤봉길의사의 사진과눈 다르죠...조작된 사진이라고합디다.

    • 공부하는사람 2011.09.24 16:28 신고

      텔미님..네 그럴 수 있어요. 다 좋습니다만,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텔미님 눈에는 사진 속 저분이 윤봉길의사님으로 보이십이까...?사진자체가 얼굴을 분간하기 어렵지만 제 눈엔 아무리 봐도 아닌거 같습니다..

  4. 초등학생이라 무시하지마세요 2013.07.27 10:19 신고

    저 밑에 있는 사진이 진짜인지는 모르겠네요. 위에 있는 분처럼 조작 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본래 윤봉길 의사의 사진과 다른 얼굴 형태인 것 같아, 조작이라 예상 되네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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