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제 타이타닉에 승선했었던 사람들 **
Bruce Ismay(블루스 이스메이)-참사의 주인
화이트 스타 라인의 사장이었던 이스메이가 실제로 선장에게 속력을 내라고 명령했는지는 모르지만, 생존자 중에 이 광경을 목격한 사람의 증언대로 이 장면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보면 거의 사실인 것 같다.
확실한 것은 그가 하인과 비서와 수많은 승객들을 내버려둔채 구명보트에 올라탔으며 이 일로 그는 생존후에도 상류사회와 언론에 의해 비난을 면치 못했다는 것이다.
청문회에서 타이타닉 참사의 책임에 대한 법적 혐의는 벗어났지만, 1913년 화이트 스타사의 사장자리를 내놓은 후 부인과 함께 아일랜드 서부에서 요양하다 1937년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Edward John Smith(참사의 장본인 선장)
타이타닉 침몰 몇개월전만 하더라도 뉴욕의 상류층은 당시 "억만장자들의 선장"으로 알려진 스미스 선장에게 경의를 표하는 만찬을 개최하였다. 그는 당시 대서양 회단항로에 있어서 가장 경험이 많고 인간관계에 재치가 있는 선장으로 손꼽혔다.
그런데 왜 이러한 스미스 선장이 한밤에 거대한 타이타닉호를 빙하더미의 바다사이로 고속질주시켰을까? 1850년 영국 스텐포드쉬어에서 태어나 어릴적부터 배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1880년 화이트 스타라인에 입사한 후 많은 신규 선박의 처녀 운항을 담당해 온 경력을 지니고 있으며 호화 여객선의 선장을 도맡았었기 때문에 백만장자의 선장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당시 가장많은 보수를 받는 고급 승무원으로 대서양 횡단항로에서 가장 경험이 많은 베테랑이었고 자신만만하고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목청을 높이는 일도 없고 유머감각이 있었으며
복종과 규율을 중시했다한다. 그는 타이타닉의 처녀항해 후 은퇴할 예정이었지만 역사적인 이 배와 운명을 같이했다. 목격자들에 의하면 스미스 선장은 영화에서 묘사된 것처럼 조종실에서 유유히 배와 함께 가라앉지는 안은 것으로 추정된다. 배가 침목하기 직전에 바다에 뛰어 들어,
주위에 헤엄치는 생존자들을 구명보트로 인도하였으나, 자신은 보트에 올라타지 안았다는 시나리오가 가장 가능성이 많다.
Frederick Fleet(빙하를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
당시 그는 앞에 있는 빙산을 보고 브리지에 당장 충돌한다는 경고를 보냈고 그전에 세번이나 거듭 보고했지만,그곳의 항해사들이 무시했다고 한다. 이 사실을 청문회의 공식석상에서는 증언하지 않았는데 이는 화이트 스타 라인사에서 뇌물을 받고 증언하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William Murdoch(일등 항해사)
영화속에서는 구명보트로 달려드는 남자들을 쏜뒤 자살해버리는 인물로 묘사되어 있지만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풀리지 않는 구명보트를 풀어 사람들을 구하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구명조끼마저 남에게 벗어주고 배와 함께 운명을 같이했다.
Benjamin Guggenheim(턱시도를 입고 브랜디를 마시며 신사답게 죽은 억만장자)
스위스에서 이민온 철강사업의 억만장자이며 현지처인 레오틴 오바와 쉐브르그에서 타이타닉에 탑승하였다. 타이타닉호의 침몰의 운명이 결정되자, 턱시로로 갈아입고 구명조끼를 거부하였다.
현지처와 하인들이 무사히 구명보트를 탄것을 확인하고 "우리는 가장 어울이는 예복을 입고 신사로서 죽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Hartley Mr.Wallace Henry(마지막 바이올린의 연주가)
어느 기록을 보더라도 타이타닉호의 마지막 순간까지 바이올린니스트 하틀리가 이끄는 8인조의 음악이 같이했음은 확실하다. 1876년 영국 콜른에서 태어나 바이올린을 전공한후 무려 70개의 호와선박에서 연주를 맡아왔다. 당시 약혼자가 있었고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으려고 타이타닉의 탑승을 꺼려했지만 역사적인 선박에 마지막으로 탑승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개인의 이득이전에 의무를 우선으로 한 그의 죽음은 영웅화되기에 충분했고 고향인 콜른에는 3미터 높이의 동상이 세워졌다고 한다. 구명보트에 탔던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선율을 들었으며 그들의 마지막 음악에 대한 논란도 많다. 영화에서는"Never My God to Thee"를 들려주지만 "Autumn"이었다는 증인들도 많았다고 한다.
Molly Brown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거의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자랐으며 Leadville이라는 광산마을에 갔다가 거기서 남편 James J.Brown을 만나고 결혼했다. 1894년 남편이 금광을 발견하여 부자가 되었으나 상류사회에서는 푸대접을 받았다. 구명보트에서 적극적인 리더쉽을 보여 추운 날씨에 저체온증으로 사람들이 얼어죽지 않도록 노를 젓게하고 남아있는 생존자들을 위해 돌아가자고 했던 인물이다. 카르페시아호에서도 부상자들을 간호했다고 한다. 남편의 죽음후에는 재산이 점점줄어들었으며 뉴욕의 어느 호텔에서 외로운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이시도&스트라우스(같이 가기로 선택한 노부부)
유명한 자선가이자 뉴욕의 맨하탄 한복판의 메이시 백화점을 소유한 스트라우스부인은 구명보트에 탈 권유를 두번이나 뿌리치고 남편과 마지막 순간을 같이 하였다. 이 사실을 안 친척이나 가족들은 그다지 그들의 선택에 놀라지 않았다. 이유인즉, 둘은 생일잔치도 항상 같이 치루는가 하면, 헤어져 있을때도 매일 편지를 교환할 정도였기에....타이타닉이 가라앉기 시작할때 선원들이 보트에 타도록 권유했지만 그녀는 대신 하인을 태우고 이제 이것도 필요없을것이라며
입고있던 모피코트마저 건네주었다.
마지막으로 두번째 보트에 강제로 태워진후 남편이 물러서자, 이 또한 뿌리치고 나와 67세의 남편과 마지막으로 포옹하는 장면을 보았다는 목격자의 증언. "물은 사랑을 채울수도 없는 반면,사랑을 죽이지도 못한다....."
1912년 침몰한 타이타닉호의 마지막 생존자 '릴리언 거트루드 애스플런드' (1907~2006)
사고 상황을 기억하고 있는 마지막 생존자로 침몰 당시 5살 이었으며, 평생 언론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리며 결혼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2006년 5월 6일 99세로 사망했다고 하네요.
마지막 남자 생존자 (2001년 사망)
타이타닉 탑승자 생존율
1위 - 1등실 여자와 아이들 (탑승객 156명, 생존자 145명) 생존율 93%
2위 - 여자 승무원 (탑승객 23명, 생존자 20명) 생존율 87%
3위 - 2등실 여자와 아이들 (탑승객 128명, 생존자 104명) 생존율 81%
4위 - 3등실 여자와 아이들 (탑승객 224명, 생존자 105명) 생존율 47%
5위 - 1등실 성인 남자 (탑승객 173명, 생존자 54명) 생존율 31%
6위 - 남자 승무원 (탑승객 876명, 생존자 194명) 생존율 22%
7위 - 3등실 성인 남자 (탑승객 486명, 생존자 69명) 생존율 14%
8위 - 2등실 성인 남자 (탑승객 157명, 생존자 15명) 생존율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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