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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식한 기자야

우리 집안은 정말 양반인가? 설마 백정...... 3부

연제를 처음 시작하면서 부터 꺼림찍 한 면이 있었다. 짦은 지식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게 옳은가 하는 점과 남의 집안에 대해서 왈가부가 비하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가지 사항이었다. 사실 족보만 전문으로 다루면서 생활을 하시는 전문가 분들이 아직도 많이 있다. 그 분들이 이글을 읽으면 무어라고 할지 모르겠다.
이 글을 계기로 자기 성씨의 유례를 다시 한번 돌아보고 실제 역사와 비교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여기서는 차마 언급못한 꽤 재미있는 사실들을 찾아 낼 수 있을 것이다.

족보 속의 거짓 말

3부 연제로 이야기를 끝내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족보를 보면서 느끼는 가장 특이한 점은 뭐였습니까? 사실 족보가 입고 없고 상관 없이 인터넷 검색만 조금 해봐도 느끼는 문제지만 족보의 가장 흔한 거짓말은 중국에서 왔다는 중국 시조설입니다. 이걸 진짜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조상은 대다수가 중국에 선조가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도 있고 또 다른 사람들은 이게 모화주의 즉 중국에 대한 사대사상 탓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상을 알고 보면 그런 이유가 아닙니다. 족보를 만들 당시의 자존심 문제 때문에 조상들이 중국에 뿌리를 두는 거짓말이 시작된 것일 뿐입니다. 대부분의 족보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 사이에 만들어 지게 됩니다. 고려 때의 귀족이 아닌 조선을 건국하는 신흥 양반들이 필요에 따라서 족보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한가지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새로 만들어진 족보에서는 윗대의 조상이 나올 수가 없다는 점 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신생족보다라고 말하고 싶은 집안이 어디 있겠습니까? 따라서 윗대가 안 나오는 뿌리깊은 족보를 만들 필요성이 있었고 가장 손 쉬운 방법이 바로 선조가 중국에서 왔다는 시조를 내세우는 방법을 사용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경향이 지나치게 심해서 중국의 상고사까지 시조를 올려 버리는 경우가 있었고 이는 가문 내에서도 지나친 감이 있다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기에 이를 부정하고 추적 가능한 시조까지만 주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족보를 살펴 보면 이런 부분이 쉽게 보이는데 보통 시조에서 고려 때까지의 족보가 얼버무려지고 이후 고려조부터(보통은 고려말)의 실질적인 인물들이 나오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대부분 본관이 고려조에 형성되게 되고 이때가 실질적인 족보의 시작인 경우가 많습니다.  보통 이 시기에 처음 파도 갈리기 시작한다. 무슨 뜻이냐 하면 족보를 만들던 시점에서 실제 알 수 있던 윗대가 저 시점이라는 것이다.

고대 왕을 시조로 하는 왕성(김이박)의 경우를 보면 또 다른 특징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삼국시대 역대 왕들이 있었음에도 특정 왕을 시조로 하는 후손들 만이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지나치게 숫자가 많지요.

여기서 족보에 대한 실질적인 문헌상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족보는 고려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것으로 고려 의종(18, 1146~1170)때 김관의(金寬毅)가 지은 『왕대종록(王代宗錄)』이 처음이다. 그러나『고려사』를 보면 고려 때에도 양반 귀족은 그 씨족계보를 기록하는 것을 중요시하였고, 제도적으로 종부시(宗簿寺)에서 족속의 보첩을 관장했다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귀족 사이에는 계보를 기록 보존하는 일이 실제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사대부 집안에서 사적으로 간행되기 시작하였으나, 1476(조선 성종7)의 『안동권씨 성화보(安東權氏 成化譜)』가 체계적인 족보 형태를 갖춘 최초의 족보이다. 이후 1565(조선 명종20)에는 『문화유씨 가정보(文化柳氏 嘉靖譜)』가 혈족 전부를 망라하여 간행되면서 이를 표본으로 하여 명문세족에서 앞을 다투어 족보를 간행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7세기 이후 여러 가문으로부터 족보가 쏟아져 나오게 되었으며 대부분의 족보가 이 때 만들어 지기 시작했다.

 

조선 초기에 간행된 족보의 대부분은 족보간행을 위해 초안을 하고 관계 자료를 충실히 보완한 뒤 간행에 착수하여 내용에 하자가 없었다. 그러나 이후의 족보들은 초안이나 관계 자료의 검토, 고증도 없이 자의적으로 기록하여 간행된 것이 많았다. 그리하여 자의적인 수식이 가하여 졌음은 물론이며 조상을 극단적으로 미화하고, 선대의 벼슬을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조작하고, 심지어 명문 집안의 족보를 사고 팔거나 훔치는 경우도 있었다. 뿐만아니라 사대주의 사상에 젖어 시조의 유래를 중국에 두어 기자(기원전 1122년 우리나라에 왔다고 함)를 따라 우리나라에 왔다고 하거나, 중국의 인물을 고증도 없이 조상 이라고 하는 식으로 족보를 꾸미기도 하였다.

 

위의 내용을 보고 의문을 표하는 분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고려조의 귀족 가문은 기록을 했으니 오랜 족보가 있을 거라고 하지만 실제로 현존하는 고려 귀족 성씨의 족보를 보면 그 때의 기록은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족보에는 너무 많은 거짓이 포함되는 것이다. 따라서 조상에 대한 진실을 알고 싶다면 성이나 족보에 의지하기 보다는 자신의 3대조의 실질적 내용을 아는 게 중요하다.

여기서 성에 대해서 집고 넘어가야 하는데 조선초기까지도 성이 없는 사람이 80%가량이었다고 한다. 성은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어 왔지만 성이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왕이 성을 하사하기도 했고 왕조가 무너질 때는 쉽게 자신의 성을 만들거나 바꿀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시점에서 필요에 따라서 자신의 성을 선택한 조상이 있었다는 사실을 쉽게 유추해 볼 수 있다. 이와 관련된 진실을 알고 싶다면야 유전자 조사를 통해서 쉽게 추적할 수 있지만 우리 특성상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된다. 특정 성씨에 몇 명의 시조(아버지)가 있고 언제 적 사람인지 알아 낼 수 있는 과학적 기술은 아주 일반적이기 때문에 차후에 유전관련 질병 검사가 널리 보급되는 시점에는 의료적 문제로 조사를 하게 되겠지만 말이다. 시재에 참석하는 사람들 유전자만 조사해도 쉽게 알 수 있지만 아마 당장하고 싶어하는 가문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족보의 가짜 여부를 확인한다는 것은 고려조 이후 족보가 완전하게 구축된 이후에 편입된 경우를 가짜 족보라고 말해야 한다.

개족보

개족보라는 말을 들어봤나? 견종의 족보라고 오해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남의 집안 족보를 비하할 때 사용하는 말이 저 개족보라는 말이다. 보통은 조작된 엉터리 족보라는 뜻이된다. 족보가 진짜인지를 확인하는 가장 기본은 본관지역에 어느 선조가 거주하였는가를 알면된다. 농업국가의 특징은 땅에서 벗어나서 사는 경우가 아주 드물기 때문이다. 서울에 올라와서 사는 경우에도 결국은 토지가 있는 고향에 기반을 두게 되는데 그건 다른 생존 수단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요즘 사극 드라마에서는 상업적 기반을 가지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만 우리 역사의 대부분의 기간에 그런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봐야 한다. (특히 족보와 관련되는 양반들은 말이다.)

이런 사실은 당시 선조들이 더 명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짜 족보에 대해서는 적당한 변명거리가 들어가게 된다. 유배라던가 전란 같은 죽고 사는 종류의 사유가 보통 사용된다.  다르게 보면 저런 종류의 큰 사건이 아니면 지역을 멀리 벗어나지 않는 다는 것을 반증하기도 한다.

따라서 자신이 현재 알 수 있는 3대조 이상의 선조 거주지를 알면 자신의 집안에 대한 진짜 내력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실은 그냥 생존하는 어른께 여쭈어보면 진실을 알 수도 있겠지만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물론 상업이나 기술관료 같은 집안이 있겠지만 그 비율은 너무나도 적기 때문에 각자 알아보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일본은 아직도 천민이 존재한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일본은 아직도 부라쿠민이라는 천민계층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고 있다 신분제가 철폐되고 세상이 이렇게 변했는데도 어떻게 그럴 수 있으며 우리는 주변을 아무리 찾아봐도 백정집안은 찾을 수가 없는데 말이다.

우리 사회에 더 이상 백정 차별이 없는 이유는 6.25전쟁 덕분이다. 마을을 떠나서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신분으로 정착할 수 있는 기회를 줬기 때문이다. 앞의 연제에서 언급했지만 일제시대까지도 백정에 대한 차별은 극심했고 이런 상황은 당시 신문에 보도될 정도로 큰 사건으로 번지기도 했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학교 운동회에 백정 여자들이 참가했다는 이유로 옷을 벗기고 재갈을 물리고 말 몰이를 하는 차별이 할아버지 세대에 있었다는 것이 상상이 안되겠지만 말이다.

따라서 형평사운동같은 백정들의 신분차별 폐지 운동까지 있을 정도였다. 그런 차별이 6.25전란을 통해서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것이다. 임진왜란이후 조선 사회가 변했던 것과 같은 이유다.

하지만 전쟁을 격었지만 마을을 떠날 일은 없었던 일본은 그 신분에 대한 흔적이 계속 남아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문제이다. 우리나라 시골에서도 어른들은 저 집안은 머슴집안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모습을 지금도 볼 수 있다.

조상의 신분을 현재에 바라보는 시각

워낙 민감한 부분이기 때문에 언론이나 공식적인 매체에서는 다룰 수 없는 이야기를 마구 다뤄봤는데 이제 마무리를 겸해서 당부의 이야기를 해야겠다.

빼대 있는 양반 집안이나 천민 백정집안이라고 현대에 와서 자부심을 같거나 비하 당할 이유는 전혀 없다. 왜냐하면 결국은 우리 모두는 같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에서 선조가 나오는 시점까지 올라가지 않더라도 우리의 조상이 되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렇게 숫자가 많지 않다는 사실이 근간의 유전자 추적 연구의 결론이 되었다.

결국 우리 모두는 형제 자매 사이의 관계라는 것이다. 족보 자랑하고 조상의 신분 자랑해봤자 너와 나는 똑 같은 부모의 자식일 뿐이니까 말이다.

이 포스팅은 그저 족보나 성씨의 진실을 알고 넘어가자는 의미 이상도 이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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