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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이야기

[펌] 서해교전 당시의 군의관 수기


이번 천암함과 관련되어서 군의관에 대한 오해로 보이는 이야기가 들려서 당시에 읽고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있어서 아래 글을 함께 해봅니다. 참고로 본 수기는 군 내부 공모전의 글로 알고 있습니다. 읽는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002년 6월 29일 토요일. 나는 터키와의 월드컵 3, 4위전을 앞두고, 축제 분위기 끝물의 애틋함이 괜히 섭섭해서 이런저 런 월드컵 이야기를 하며, 동료들과 노닥거리며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웬걸? 갑자기 구내방송이 나오고 분위기가 어수선해 졌다. 이윽고, TV에서는 연평도 앞바다에서 양측 해군 간에 교전이 있었다는 보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국군수도병원 전 군의관을 비롯한 장병들은 퇴근을 미루고 대기상태로 남 겨졌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를 보낸 후, 헬기를 통해서 환자들이 후 송 중이라는 소식이 들리는 가운데 필요 인원만 남기고 나머 지는 퇴근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북방한계선을 넘어 남쪽으로 계속 내려오는 북쪽 배를 가로 막고자 참수리 357호는 배의 옆구리로 적선의 진로를 막는 ‘차단기동’을 하고 있었다 한다. 차단기동이 무시무시한 이유 는 서로 간에 배의 옆구리를 고스란히 노출시키게 된다는 점 이다. 이건 피차간에 절대 공격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전제 로 한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남하(南下)하던 북측 배가 방향을 틀며 옆으로 도는 순간 우 리 장병들의 눈에는 포탑을 돌려 조준하고 있는 인민군들이 보였다. ‘어, 쟤네들 왜 저래?’ 하는 순간 적의 85mm포가 불을 뿜었고 무척이나 가까이 붙 어 있던 우리 배의 함교(조타실)가 명중 당했다. 그리고 우리 의 포탑들이 차례로 가격 당했다.

이때 함교와 포탑에 위치하던 장병들이 대부분 전사했다. 우 리와 같은 전자조준장비도 없이, 수동으로 포를 조준하는 북 쪽 함정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우리를 노리고 미리 공 격계획을 가진 상태에서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중앙 통제실인 함교가 무력화되고 대응 사격할 수 있 는 포탑들이 날아간 상황에서 우리 해군은 어려운 전투를 벌 이게 됐다. 유명한 이야기지만 권모 상병 같은 경우는 왼손이 날아간 상태에서 오른손만으로 M60 기관총을 발사하는 투혼 을 보였던 눈물나는 전투는 이렇게 시작됐다.

더욱 황당한 것은 피격당한 참수리 357호가 당하고 있는 동 안 급히 접근한 참수리 358호에서 북측 경비정에 포탄을 퍼 부어댔지만, 그 상황에서도 북측 경비정은 오로지 357호만 공격했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더 위협적인 상대를 먼저 공격해야 함에도, 참수 리 357호를 침몰시키겠다고 작정을 했던 모양인지 ‘난 한 놈 만 패’식의 공격에 의해 357호는 결국 가라앉아 버린다.

당연히 북측 경비정은 옆에 있던 358호에 의해 신나게 두들 겨 맞아서, 침몰되는 것만 겨우 면하고 퇴각하게 됐고 이후 들리는 이야기로는 북측 사망자만 30명 이상이라 한다.

그렇게 오전을 보낸 가운데, 나는 오중사의 맞은편 침상에서 생존자 중 가장 많이 다친 박 상병을 접하게 되었다. 건장하 고 준수한 청년이었다. 의식은 없었고 인공호흡기가 달려 있 었으며, 내가 군대온 이래로 목격한 가장 많은 기계와 약병들 을 달고 있는 환자였다.

파편이 배를 뚫고 들어가서 장을 찢었고, 등으로 파고 들어간 파편은 등의 근육과 척추에 박혀있었으며, 등과 옆구리는 3 도 화상으로 익어 있었다. 오른쪽 허벅지에도 길쭉한 파편이 박히고, 전신에 총상과 파편창이 즐비했다.

“쟤는…, 왜 저렇게 다쳤어요?”

옆 침상에 누워 있던 부정장 이중위에게 물었다. 그는 포탄에 맞아 왼쪽 발목이 부서져 절단술을 끝낸 상태였고, 그 옆에는 한참을 울었는지 눈이 발그레 부어오른 젊은 아가씨가 앉아 있었다. 약혼자란다.

“우리 배의 의무병 녀석인데, 부상자들 처치(치료)한다고 몸 을 아끼지 않고 뛰어다니다가 그랬습니다.”

참수리 357호의 의무병이었던 박상병은, 첫 포탄에 조타실 이 깨지면서 파편에 쓰러진 정장 윤영하 대위를 몸으로 덮고 함교 계단 아래로 끌고 내려가 심폐소생술을 시도했으나, 방 탄조끼 밑으로 줄줄 흐르는 핏물을 보며 소용없음을 깨닫고 는 다시 나가 쓰러지는 전우들을 치료하기 위해 몸을 숨기지 않고 뛰어다녔다.

당연히, 총을 쏘는 전투병은 엄폐물에 몸을 숨긴 채로 사격을 하게 마련이지만, 부상병을 찾아 이동해야하는 의무병은 전 투 시 가장 위험한 처지에 놓이는 것이다. 총탄에는 눈이 없 다.

이야기를 듣자 울컥했다. 멋진 놈…. 그런데, 이게 뭐냐.

상태는 굉장히 안 좋았다. 출혈이 엄청나서 후송 당시부터 쇼 크 상태였고, 수술하는 동안에도 엄청난 양의 수혈이 필요했 다.

정형외과와 외과 군의관들이 달려들어 가능한 대로 파편과 총탄을 제거하고, 장루를 복벽으로 뽑고, 부서진 오른쪽 허벅 지의 혈관을 이어놓은 상태였다. 엄청난 외상으로 인한 전신 성 염증반응 증후군(SIRS)으로 인해 혈압이 쉽사리 오르지 않아 결국, 순환기내과 전공인 나도 박상병과 인연을 맺게 된 다. 스완갠쯔 도자를 삽입하고 수액과 승압제로 혈압을 힘겹 게 유지해 나가는 가운데, 후송 시부터의 쇽에 의한 급성 신 부전 때문에 신장내과 동료도 힘을 합해 혈액투석을 지속했 고, 외상성 ARDS가 속발해 호흡기내과 동료도 합류한다. 방 광 손상이 발견돼 비뇨기과 동료도 합세하고, 부비동에 문제 가 생겨 이비인후과 군의관도 손을 더했다.

건장했던 박상병은 다행히도 질긴 생명력을 보여주었고, 그 가운데, 나는 테니스 친구, 술친구들에 다름 아니었던 동료군 의관들이 실은 대단한 의사들이었음에 새삼스러워했다.

‘너는 반드시 살려낸다!’

박상병의 숭고했던 행동을 여러모로 전해들은 우리 군의관들 은 암묵적으로 동감하고 있었다. 이기심으로 질펀한 세월을 뚫고 오면서 형편없이 메말라 버린 내 선량함에 박상병의 회 생은 한통의 생수가 되어 줄 것만 같았다. 뭔가 해줄 수 있다 는 것….

레지던트 기간 동안 수없이 지새워냈던 하얀 밤들과 바꿔낸 중환자관리의 기술이 너무나도 기꺼웠다. 하지만, 감염부위 에서 녹농균과 메치실린 내성 포도상 구균이 배양되면서 소 위 항생제의 마지막 보루라 일컬어지는 이미페넴, 반코마이 신, 아미카신으로 배수진을 치게 됐다. 오르내리는 체온에 일 희일비하는 가운데 전신상태는 조금씩 호전되고 있었지만 오 른쪽 다리가 서서히 차가와지며 색이 죽기 시작했다. 부서졌 던 혈관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결국, 고관절부위에서 절단이 이뤄졌고, 사타구니 아래쪽 오 른다리는 그렇게 사라졌다. 사지(四肢) 손실이 감정적 아쉬 움에 그치는 사건은 아님을 누구나가 알고 있었지만, 다른 길 이 없었다. 아픈 마음과 괜스런 죄책감을 그나마 생명이라도 지속된다는 사실로 슬그머니 달래 버렸다.

그렇게, 3주를 지내며 더 이상의 발열도 없었고 등과 옆구리 화상부위 및 관통창에는 발간 육아조직이 자라고 있었다. 수 술부위의 상처들도 자리가 잡혔다. 인공호흡기도 멈췄고, 기 도절개를 미루며 버텨오던 기도관도 제거했다. 박상병이 말 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사이 바싹 말라버린 박상병은 정신을 차리면서 오 히려 군의관들을 힘들게 했다. 현실을 서서히 깨닫게 되면서 차오르는 불안과 공포와 절망감을 입으로 표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주렁주렁 매달린 약병 사이에서 부서진 육 체로 꼼짝 못하고 누워 흐느끼는 젊은 장정을 바라보는 일은 너무나도 불편했다. 정신과 군의관이 나서서 도움을 주었지 만, 그 역시 박상병의 망가진 육체와 앞으로 닥치게 될 고난 을 대신해 줄 수 없음은 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박상병은 그렇게 회복돼 갔다. 그 사이 오중사는 방광 수술을 위해 비뇨기과로 옮겨지고, 부정장 이중위도 정형외 과 일반병실로 옮겨졌다. 박상병이 서해교전 환자들 중 가장 늦게 중환자실을 빠져나와 외과병동으로 옮겨지게 됐다.

가장 위중했던 그의 회복으로 서해교전으로 인한 전투 시의 사망자 외 추가 사망자는 단 한명도 나오지 않았고, 이에 고 무된 병원 측은 수고한 군의관들에게 포상으로 위로휴가를 주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부상으로 인한 고통스러운 사건에서 얻은
개인적인 호사(好事)여서 마음이 불편했지만, 내가 어쩔 수 있는 일도 아니라며 자위를 했다. 따지자면, 6.25 동란, 경술 국치까지도 거슬러 올라가야 할 일이라고….

그렇게 얻어진 휴가로 나는 아내의 출산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내 딸의 첫 모습을 대한 순 간만큼은 광막한 우주 속에 나와 아이, 단 둘만 존재하는 감 격이었다. 그 때까지 내 삶이 순전히 그 순간을 위한 것이라 해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다시금 현실로 돌아와서도, 배 냇짓을 하는 딸아이에게 풍덩 빠져 보내는 사이에 또 한달 정도가 흘렀다.

어느 날, 박상병이 다시 중환자실로 내려졌다는 이야기를 들 었다. 의식이 나빠져 CT를 찍어보니 뇌실질 전반에 걸친 세 균감염이 의심된다는 것이었다. 예의 배수진용 항생제들은 계속 사용되던 중이었고, 중환자실에서 다시 만난 박상병은 완연히 수척해진 상태로 인공호흡기와 약병들에 또다시 생명 을 매달고 있었다.

새로 개발된 항생제들을 민간에서 구매해서 사용하기도 해봤 지만 패혈성 쇼크가 이어지며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결국 9 월 20일 금요일 새벽에 젊은 심장은 마지막 박동을 끝냈다.

이틀 뒤, 가족들의 오열 속에 우리 병원에서 영결식이 거행되 고, 박병장(상병에서 진급)은 대전국립묘지에 묻혔다. 충무무 공훈장도 수여됐다. 하지만 그는 꿈꿔왔을 나머지 인생을 하 늘로 가져가야 했고, 그의 부모님은 아들을 잃었다. 그를 만 났던 군의관들의 가슴에도 구멍이 났다.

옴짝달싹 못하는 역사의 틀 속에서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고, 인류사에 전쟁이 없어지는 일은 아마도 없겠지만, 한 선량한 젊은이의 아까운 죽음을 옆에서 지켜봐야 했던 일은 말할 수 없는 무력감을 안겨줬다. 나도, 내 주위 의 사람들도 남이 일으키는 전쟁에 인생을 맡겨야 할 수도 있는 초라한 존재 일 뿐이었다. 군의관 생활을 하면서 바라본 전쟁은 더욱 두려운 모습으로 저 멀리 서있다. 아득하게 멀지만 언제 달려들지 모르는 그의 섬뜩한 실루엣을 본다. 갖가지 대의명분으로 치장해도 전쟁은 부서지는 육체와 영혼을 제물로 삼아야 한다. 전장에서 맞닥뜨려야 할 맹목적인 폭력들. 그리고 잇따르는 수 많은 이의 비극들. 이를 막기 위한 소위 ‘전쟁억지력’을 키우기 위해 수많은 젊은이들을 군인으로 만들고, 더 많은 무기를 갖춰야 하는 또 다른 아이러니 ….

그렇게 가을을 보내던 중 병원 앞 산책로에서 이 중위와 그의 휠체어를 밀고 있는 약혼녀를 만났다. 처음 중환자실에서 대하던 날의 우울했던 첫인상이 무색하게도 그들은 밝은 모습이었다. 이 중위는 의족 보행 연습을 시작한 뒤 였고, 퇴원 후 다시 해군으로 복귀해 사무직에서 복무할 예정이었다. 그들의 결혼도 예정대로 이뤄질 거란다.

삶은 계속되기에 여전히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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