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이 기록은 이전 3.1운동에 관련된 학술발표 포스팅에 이어서 실례를 보기 위해서 찾은 자료입니다. 출처 등은 글 말미에 첨부합니다. 딱딱한 법정기록인 만큼 읽는 편의를 위해서 제 생각은 기록 안에 넣어서 간단히 읽고 싶은 분들의 요구를 만족시키려고 합니다.

 

 


대정 8년 형공(刑控) 513

 

3.1운동이 있던 1919 (大正 : 다이쇼) 재판입니다. 다음 동일 사건으로 재판 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나열 됩니다. 피고의 이름을 보시면 무슨 사건의 재판인지 알게 됩니다.

 

   

충청남도 천안군 동면 용두리(東面龍頭里)

농업 조인원(趙仁元)

56

동도 동군 수신면 복다회리(卜多會里)

농업 김상훈(金相勳)

46

동도 동군 동면 용두리 

학생 유관순(柳寬順)

18

 

너무나 유명한 이름이지요. 18세의 유관순열사 바로 아우내장터 만세사건으로 체포된 유관순과 그 마을 사람들의 재판 기록입니다. 재판 기록에도 수천명의 사람이 참가했다고 나오지만 실제 재판에 회부된 사람은 이 분들입니다. 이후에는 존칭없이 유관순으로 칭하겠습니다.

 

동도 동군 동면 동리

교사 유중무(柳重武)

45

동도 동군 수신면 발산리(修身面鉢山里)

농업 김용이(金用伊)

24

동도 동군 동면 용두리 

농업 조병호(趙炳鎬)

21

동도 동군 수신면 복다회리 

농업 백정운(白正云)

24

동도 동군 동면 동리   

농업 신 씨( )  

67

동도 동군 동면 용두리

농업 조만형(趙萬衡) 

21

동도 동군 갈전면 병천리

농업 박제석(朴濟奭)  

19

동도 동군 동면 동리

이발업 박봉래(朴鳳來)

27

 

 위의 11명에 대한 소요 및 보안법위반 피고 사건에 대해 대정 8 5 9일 공주지방법원이 언도한 유죄판결에 대해 피고 11명으로부터 공소 신립이 있었으므로 당 법원은 조선총독부 검사 수야중공 관여로 다음과 같이 심리 판결한다.

 

많은 사람이 참여했던 사건으로 이미 공주 지방법원에서 판결을 받고 다시 경성 복심원으로 항고한 11명의 최종 판결문이다. 그리고 판결문 원본은 당연히 일어로 되어 있는 문서입니다.


위키의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 요약은 다음과 같습니다.
  • 일시:1919년 4월 1일(음력 3월 1일)
  • 장소:천안 아우내 장터
  • 경과:천안 아우내 만세운동은 성공회 병천교회에서 운영하던 진명학교 교사 김구응이 지역 유지들과 젊은 청년, 학생들과 함께 준비한 만세운동이다. 독립선언문을 발표한 김구응과 그 모친 최씨가 총탄에 맞아 즉사했으며, 유관순을 포함한 많은 참가자들이 부상, 투옥등의 어려움을 겪었다.

 


                 

 

원 판결 가운데 피고 조인원, 김상훈, 유관순, 유중무, 김용이, 조병호, 백정운, 조만형, 박제석에 대한 부분 및 피고 신씨에 대한 유죄부분을 취소한다.

피고 조인원, 유관순, 유중무를 징역 3년에 처하고, 피고 김용이, 조병호를 징역 2 6월에 처하며, 피고 김상훈, 백정운을 징역 1 6월에 처하며, 피고 조만형, 박제석을 징역 8월에 처한다.

피고 신씨, 김상훈, 백정운, 조만형, 박제석에 대한 소요 공소사실은 무죄를 언도한다. 피고 박봉래의 공소는 이를 기각한다. 압수물건 가운데 영 제 1호 구한국 국기 한 자루는 이를 몰수하고 여타는 소유자에게 환부한다.

 

이 서류가 발견되기 까지 유관순이 받은 형량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있었으며 재판장에서 의자를 집어 던졌다는 전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해졌던 7, 5년 보다는 작은 3년 형을 최종적으로 언도 받았습니다. 참고로 공주 지방법원에서는 5년형을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형량과 비교해보면 가장 무거운 형량 그룹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특이점은 이전 포스팅 내용을 연상할 수 있는 부분으로 소요 부분에 대해서 무죄를 언도 받은 5명과 공소 기각되는 이발업의 박봉래라는 분입니다. 막연하게 가지고 있던 상황과는 좀 다른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1. 피고 유관순은 재 경성( 京城) 이화학당(梨花學堂) 생도인바 대정 8 3 1일 경성에서 손병희 등이 조선 독립 선언을 발표하고 단체를 만들어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며 각처를 행진하며 독립 시위운동을 벌이고 있음을 보고 동월 13일 귀향하여 4 1일 충청남도 천안군 갈전면 병천(竝川) 시장 장날을 이용하여 조선 독립 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꾀하고 자택에서 태극기(구 한국 국기 압수 영 제1)를 만들어 이를 휴대하고 동일 하오 1시경 동 시장으로 나아가 그곳에서 수천명의 군중 단체에 참가하여 전시 태극기를 휘두르며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고 독립 시위운동을 감행하여 치안을 방해하였고 피고 유중무·김용이·백정운·박제석·조만형·김상훈·조인원·조병호·박봉래는 동년 4 1일 하오 1시경 전시 병천시장에 나가 다수 군중 단체에 참가하여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며 독립 시위운동을 감행함으로써 치안을 방해하였다.

 

유관순이 주모자이며 핵심인물 임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여러 장의 태극기중에 유관순이 사용한 태극기가 가장 크고 아름다웠던 거 같습니다. 남아있다면 문화재 지정감일텐데...

이후의 내용을 보면 당시의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2. 전시(前示) 피고 등이 이와 같이 독립 시위운동을 하자 그곳에서 약 50보 거리의 철천 헌병주재소 헌병이 이를 제지하려 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으매 발포하여 다수의 사상자(死傷者)를 냈으며 피고 유관순의 부()이며 유중무의 형인 유중권(柳重權)도 그 피해자의 한 사람인바 피고 유중무 및 군중은 그 피해자를 둘러매고 주재소로 몰려가 피고 유중무·유관순·김용이·조인원·조병호는 군중에 솔선하여, 유중무는 두루마기의 끈을 풀러 대성격노(大聲激怒)하여 헌병의 목을 졸라 매려고 하였고 또 그형인 피해자를 동 주재소 사무실로 넣으려 하자 이를 제지하려는 헌병 보조원 맹성호(孟星鎬)에 대해너는 보조원을 몇십년 하겠느냐? 때려 죽이겠다고 하였고 피고 유관순은 동 주재소장을 잡아 나꿔채며 항의하였고 피고 김용이는 헌병에게 투석하고 동 주재소 보조원 정수영(鄭壽永)에 대해조선 사람이면서 무엇 때문에 왜놈의 헌병 보조원을 하느냐? 죽여 버리라고 호통치며 주전자를 그의 가슴에 던졌고 피고 조인원은 상의(上衣)를 벗어 동 주재소장 및 헌병들의 총을 나꿔채며 그 아들인 조병호는 전시 헌병 상등병의 뺨을 때리고 협박했으며 군중은 동 주재소원의 총에 달려들어 탄약합(彈藥盒)을 잡아떼며 또는 소장을 죽이라고 외쳐 소란을 피웠다.

 

당시의 상황이 좀더 명확하게 보이는 내용입니다. 그 중 눈에 뜨이는 부분은 유관순의 아버지가 주재소 헌병의 총검에 사망하자 흥분한 사람들이 주재소로 처들어 갔다는 부분입니다. 상황 묘사가 상당히 자세해서 유관순의 작은 아버지가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이후에 주재소측 근무자 시각의 진술도 있기 때문에 흥미롭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아버지의 시신을 모시고 주재소로 처들어 가 주재소 소장을 멱살을 잡고 항의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새롭게 느껴집니다. 더욱이 무장하고 있는 헌병들이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보이네요.

 

 

  1의 사실은 당 법정에서의 피고 유관순·유중무·김용이·박제석·조만형·김상훈·조병호·박봉래의 각각 판시사실과 동일한 요지의 공술 및 피고 백정운·조인원의자기들은 대정 8 3 1일 이후 조선 각지에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는 독립 시위운동이 일어나고 있음에 자기들은 병천 시장에 나가서 군중 시위운동을 구경하고 있었다는 요지의 진술과 원심공판 시말서 중 피고 유관순의압수 영 제 1호의 구 한국 국기는 자기가 만들었다는 진술, 동 피고 백정운의자기는 김상훈이 태극기를 건네 주어 그것으로 만세를 불렀다는 진술과 사법 경찰관의 조인원에 대한 신문조서 가운데자기는 유중무·유중권 및 자기 아들 조병호와 함께 태극기를 앞세우고 자기가 큰 소리로 만세를 불렀다는 요지의 공술 기재를 종합하여 이를 인정하며,

 

소요죄 부분에 무죄를 받은 분들은 자신들은 그저 시위를 구경하다 건네준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불렀다고 진술하는 군요.

재판 결과를 보면 주동은 아니지만 적극 가담자라는 분류를 받은거 같습니다.

 

  2의 사실은 당 법정에서의 피고 유관순은병천 시장에서 만세를 부르고 있을때 헌병 주재소와는 약 50보 거리였는데 헌병이 쫓아와 군중을 향해 발포하고 총검을 휘둘러 즉사 19명 중상자 30명을 내었고 자기 부친도 살해되었는데 헌병이 군중에게 발포하려고 총을 겨누었을때 자기는 쌍방을 제지키 위해 헌병의 총에 달려 들었다고 진술하고 있고, 동 유중무는주재소 헌병이 군중의 행동을 제지하려고 했으나 군중이 이에 응하지 않아 부득이 발포하여 군중 가운데 사자(死者) 2명이 생겼으며 이에 격분한 군중은 시체를 주재소로 밀어 넣었고 자기는 형 유중권이 헌병에게 총검으로 옆구리 및 머리를 찔려 빈사 상태에 빠지자 형을 업고 주재소로 가 치료를 달라고 요구했다는 요지의 공술을 하였고,


 

막연하게 알던 일제시대의 분위기와는 다른 내용들이 들어있네요. 주재소로 가 형(유관순의 아버지)의 치료를 요구했다니 재판 과정에서 필요에 의한 진술인지 진짜 였는지 모르겠습니다.

 

 동 김용이는자기는 주재소로 몰려가 만세를 외쳤다는 진술을 했으며 동 조병호는자기는 조인원의 아들이라는 공술을 했으며 원심공판 시말서 가운데서 조인원의헌병의 발포로 자기는 좌흉부(左胸部)를 맞았고 왼팔을 총검으로 찔리웠고 또한 사망자 2명이 발생하매 그 시체를 메어 주재소로 갔었다는 공술과 검사의 조병호에 대한 신문조서 가운데만세를 외치자 헌병들이 발포하여 일단 피했었고 군중이 주재소로 몰려갔으나 헌병이 시체를 밖으로 내어 던졌다는 요지의 공술 및 사법 경찰관의 김용이에 대한 신분조서 가운데서자기는 헌병에게 한번 투석했고 그 손을 잡아 당기며 병기(兵器)에 손을 댄 일이 있다는 요지의 공술과 원심공판 시말서 가운데서 피고 유관순은만세를 부른 다음 주재소로 가자 부친이 죽어 있었기 때문에 격분하여제 나라를 되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했는데 어째서 군기(軍器)를 사용하여 내 민족을 죽이느냐고 대어들다 헌병이 총을 겨누기에 죽음을 당할까 보아 그 가슴에 달려들었다는 요지의 공술과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이 보이는거 같습니다. 다음의 내용을 보면 주재소 헌병의 입장에서 바라본 만세운동의 모습이 보입니다. 또한 발포 책임자도 명확하게 나옵니다.

아래 내용 중에 18세의 여자 유관순이 소장의 멱살을 쥐고 휘저었다고 나오는데 당시 유관순은 키가 170Cm정도 였다고 한다. 당시로써는 거구인 유관순에게 잡힌 일본인 소장 꼴이 참 아니었을거 같다.

 

검사의 헌병 상등병 진 상부( 相部)에 대한 조서 가운데자기는 철천 헌병주재소 재근(在勤)인 헌병인데 판시 일시, 병천 장날 하오 1시 경 만세를 외치며 군중이 대한 국기를 선두에 세우고 몰려왔기 때문에 해산을 명했으나 응하지 않아 기총(騎銃)을 발포한즉 일단 물러갔으나 그 뒤 이 발포로 말미암아 유관순의 부친과 남씨(南氏)의 남편이 사망하였다고 하여 약 40명의 군중이 그 시체를 메고 주재소로 다시 몰려와 무엇인가 떠들기에 주재소원 너댓 명이 밖으로 달려 나오자 1 5백 명 이상의 군중은 주재소로 몰려오고 있었고 소원 5명은 주재소 앞에 정렬하여 있을 때 유리창이 깨졌으며 그로부터 자기들은 사무소 입구 왼쪽 벽에 병렬(竝列)했는데, 군중은 자기들 5명이 소지한 기총에 달려들어 탄약합을 잡아당기고 소장을 죽이라고 외치며 소장을 끌어 내려하여 권총을 몇 번 발사한즉 군중은 다시 도망쳤는데 그 가운데 피고 유중무는 두루마기의 끈을 풀어 고함을 지르며 헌병을 잡고 조르려는 기세를 보였고 조인원은 처음 시체를 밀어 넣을 때 시체와 함께 들어서서 상의를 벗고 소장의 총에 달려드는가 하면 또한 자기의 총에도 달라 붙었고 유관순은 소장의 착의(着衣)에 달라 혈흔이 부착해 있음을 가리키며 군중에게 무엇인가 외치고 소장의 멱살을 쥐고 휘저었고 조인원의 아들은 자기의 뺨을 한번 때리더라는 요지의 공술

 

다음은 우리가 흔히 친일파 앞잡이의 대표적 존재라고 알고 있는 헌병 보조원의 진술이 나옵니다.

 

기재 및 사법 경찰관의 헌병 보조원 맹성호에 대한 신문조서 가운데대정 8 4 1일 피고 유중무는 그의 형이 장터에서 헌병에 의해 중상을 입었다하여 형을 업고 주재소로 들어오려고 하기에 제지하자 그는 자기들에 대해너희는 몇십년이나 보조원을 하겠느냐? 때려 죽이겠다고 하며 치고 김용이는 자기들에 대해어째서 왜놈들과 함께 일하는 보조원 노릇을 하느냐? 함께 만세를 부르라. 그렇지 않으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이라고 호통을 치더라는 요지의 공술 및 동 보조원정 수영에 대한 신문조서 가운데판시 일시 철천 시장에서 군중이 독립만세를 외치고 있음에 소산(小山) 주재소장 외 4명은 자기와 맹성호에 대해 장터로 출동하니 주재소 사무소를 발포 준비를 하고 있으라 명하고 떠났으나 잠시 후 총성이 들려 왔으며 이윽고 유중무와 김용이는 군중과 함께 부상자를 주재소로 업고와 주재소로 넣으려 하기에 문을 닫자 김용이는 자기들에 대해조선 사람이면서 무엇하느냐? 몇십년 보조원을 해먹을 생각이냐? ‘죽여버리겠다고 하기에 부상자에게 더운 물을 주라고 하며 주전자를 내어 주자 이 따위 물을 마실 수 있느냐고 자기에게 주전자를 집어 던져 가슴을 얻어 맞았다는 요지의 공술 기재를 종합하건대 이상의 사실을 인정한다.

 

당시 헌병 보조원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이 보이네요.

 

 법에 비추어 피고 유관순·유중무·조인원·김용이·백정운·박제석·조만형·김상훈·조병호·박봉래의 제1의 소위는 범죄 후의 법령에 의해 형의 변경이 있었으므로 형법 제8·6조에 따라 신·구 양법을 비교하여 그 가벼운 바를 적용할 것이매 신법에 의하면 대정8년 제령 제7호 제1조 제1항에 해당하며 구법에 따르면 각각 보안법 제7·조선 형사령 제42조에 해당하는 바 형법 제 10보에 따라 각각 구법이 가벼운 바 이의 법조문을 적용코 징역형을 선택, 피고 유관순·유중무·김용이·조인원·조병호의 제2의 소위는 각각 형법 제106조 제2호에 해당되며 징역형을 선택하고 동 피고 등은 형법 제45조에 따라 병합죄임에 동법 제47·10조에 따라 무거운 제2의 죄에 파형할 것으로 동법 제47조 단서의 가중형이 타당하다고 보아 피고 유관순·유중무·조인원을 각각 징역 3년에 처하고 피고 김용이·조병호를 각각 징역 2 6월에 처하며 피고 김상훈·백정운을 징역 1년에, 피고 조만형·박제석을 각각 징역 8월에,피고 박봉래를 징역 6월에 처한다. 피고 김상훈·백정운·신씨가 판시 제2의 소요죄에 가담하여 피고 조만형·박제석이 동소요에 가세(加勢)하고 또는 부화수행(附和隨行)하였다는 공소사실은 이를 인정할만한 증빙이 불충분한바 동 피고 등에 대해서는 형사 소송법 제258조 제 1, 236·224조에 따라 각각 무죄를 언도한다.


 압수물건 중 구 한국 국기 한 자루는 피고 유관순 소유의 제 1범죄 공용물이므로 형법 제19조 제1항 제 2·2항에 따라 이를 몰수하고 여타는 형사소송법 제 202조에 따라 일체 소유자에게 환부한다.

 원판결에 있어 피고 신씨에 대한 소요 공소사실은 그 증거가 충분타고 보아 유죄판결을 했고 피고 김상훈·백정운·조만형·박제석에 대해 소요 공소 사실을 그 증거가 충분타고 인정하여 판시 치안방해 죄와 병합죄로 처단했고 또한 피고 유관순·유중무·김용이·조인원·조병호에 대한 형의 양정(量定)은 과중하여 타당치 않으매 동 피고 등의 공소는 각각 이유있고 피고 박 봉래에 대해 판시 사실을 인정하여 판시 법조문을 적용하고 징역 6월을 선고했음은 타당한 바 동 피고의 공소는 이유 없으므로 동법 제261조에 따라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대정 8 6 30

                                    경성 복심법원 형사부 재판장

                                    조선총독부 판사 총원 우태랑


본 문서는 유관순기념관 자료이며 유관순은 저 판결로 3년형을 언도 받지만 이후 대사면령으로 형이 1/2으로 감형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유관순은 출소 이틀전에 사망하고 만다.

  1. 어멍 2009.04.16 11:50 신고

    치안방해죄, 소요죄, 보안법(현 국가보안법의 모법)...하며 어렵지만 익숙한 법률용어와 문법하며...일제와 지금이 본질에서 얼마나 다르며 우리는 얼마나 이를 극복했는지...헌병보조원 맹성호와 그의 자손들, 당시 법원법률관계에 종사했던 한국인들은 이후 삶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많은 생각이 드네요. 민중은 가장 낮은 곳에 있지만 그들이 내는 힘은 가장 순수하고 강력하지요.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최근 3.1운동 90주년 국내전문가 집중토론회에서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내용이 발표되었다. 워낙 불편한 내용이라서 그런지 널리 보도되지는 않은거 같다.

이런 내용을 애써서 외면하려는 분들도 있고 또는 발표 자체를 매도하는 분도 있다. 뭐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불편하지는 않다. 왜 불편해하는 것일까?

3.1운동은 피지배계급을 역사의 주체로 등장시키고 이는 민주 공화정의 디딤돌이된 근대화 운동이자 민족운동이라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옥중의 유관순누나

17살의 유관순 투옥 사진


이런 해석만을 듣던 사람들이 다른 이야기를 듣게되자 상당히 불편한 해지는 것이 사람 마음이라고 하겠다.

마치 짝사랑하는 순이가 설사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느끼는 혼란된 마음 같다고 해야할까?

이번에 발표된 불편한 이야기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성균관대 천정환 교수는 20일 성균관대 600주년기념관에서 열린 ’3.1운동 90주년기념 국내전문가 집중토론회’에서 발제문 ’소문(所聞)ㆍ방문(訪問)ㆍ신문(新聞)ㆍ격문(檄文): 3.1운동 시기의 미디어와 주체성’을 통해 3.1운동 당시 일부 지식인들이 무식했던 일반 민중에게 시위에 참가하라고 협박한 사실을 주목했다. 그는 당시 재판 기록을 보면 기소된 피고인 중 ’무식자’(無識者)들은 “’유식자’의 선동에 의해 (시위에) 참가했다고 진술”했으며, 유식자들의 선동은 때로 “’만세를 안 부르면 밟아 죽인다’, ’집을 불태워버리겠다’는 협박에 기초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천 교수는 “협박은 주로 마을의 ’유지’ 등 식자층에 의해 행해진 것으로, 그 대상은 특히 ’무식한’ 민중이었다 할 수 있다”고 덧붙이면서 “정치적 무책임의 세계에 살던 민중은 아직 ’민족’으로도 ’민중’으로도 형성돼 있지 않았던 건 아닐까?”라고 조심스럽게 ’3.1운동의 민중 탄생’ 담론을 반박했다.

천 교수는 이 같은 사실들이 “거대한 적과 맞서야 하는 ’운동’의 조급함이 언제나 불러일으키는 ’잡음’ 같은 것”으로 간주할 수 있겠지만 “협박은 연대나 접속이 아니라 무조건 동원 또는 탈접속”이라는 점에서 3.1운동을 통해 민중이 탄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에둘러 지적했다.

천 교수는 또 최남선이 작성한 ’기미독립선언서’와 관련, “추상적인 내용과 극도로 현학적이며 고식적인 문체, 그리고 완벽한(?) 한주국종(漢主國從) 표기법”으로 이뤄졌다고 설명하면서 “이 선언서로 과연 어떻게 민중을 조직할 수 있었을까”라고 의문을 제기했

저런 이야기는 널리 알고 있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가 짝사랑하는 순이는 착하고 이쁘지만 화장실에 가서 볼 일도 봐야되는 바로 내옆의 사람이라는 걸 알아야만 사랑 고백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관순 졸업 사진

1918년 3월 말 즉 윗 사진의 1년전


기실 우리는 3.1운동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독립선언문, 유관순누나, 아우내 장터 하지만 저 인용문에 나오는 '무식자'즉 문맹 또는 무학력인 이들이 어떤 과정으로 생각으로 만세운동에 동참했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볼 필요는 분명히 있다. (생각을 해보면 꼭 저런 협박이 있어야 되는건 아니다. 단순한 일제에 대한 반감만으로도 쉽게 선동 될 수도 있기 때문이고 재판과정에서는 죄를 회피하기 위해서 저런 변명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널리 알고 있는 프랑스 대혁명에서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혁명의 업적이자 상징처럼 널리 알려진)해서 구출해낸 사람은 단지 7명이었으며 그들은 정치 사상범이 어니었으며 구출된 대표적인 인물이 싸디즘으로 유명한 야설의 아버지 사드 남작이었다는 거짓말 같은 진실 말이다. . 개인적으로 사드의 소설을 흥미있어 하지만 그가 거기서 구출된 사실에 그닥 기쁜 감정은 들지 않는다..

그토록 프랑스가 자랑하는 프랑스혁명에는 불편한 진실들이 가득 들어있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은 그런 사실들도 널리 알고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그런 사소한 내용들이 프랑스 대혁명의 가치를 훼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찮가지로 3.1운동이나 독립운동의 불편한 진실들이 있다고 해서 그 근본적인 가치는 훼손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오히려 모든 진실을 알아야만 그 가치를 더욱 진실되게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 폭탄은 무슨 도시락인가?

+ 발표 내용을 직접 본다면 좀더 자세한 이야기가 있었겠지요. 저 인용에서는 독립운동의 조급함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만 이해관계는 다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7살의 유관순이 왜 고향까지 내려가서 아우내의 거사를 치루었느냐 같은걸 생각해 보자는 뜻에서 유관순 누나(영원한...)의 사진을 삽입했습니다.
두번째 사진속의 유관순과 동무들을 보면 피상적으로 생각하던 유관순 보다 좀더 많은 생각을 해볼 수 있지 않습니까? 
  1. 미리내 2009.04.06 15:46 신고

    불편한 진실도 당연히 밝혀져야 하겠지요. 하지만 소위 유식자들이 무식자들을 겁박해서 얻은 이익이 무엇이었을까요? 그리고 저런 사례들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는지도 부연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2. 지나가다가 2009.04.06 15:59 신고

    회손이 아니라 훼손입니다.

  3. neo 2009.04.06 18:51 신고

    일제강점기, 일제와 친일파들에 의해 이루어졌을 재판과 그 재판기록에 근거해서, 그것도 <일부>의 사례를 들어 설을 펴다니 발표한 천 모라는 이가 실없어 보이네요.

  4. 여울 2009.04.06 19:12 신고

    광주사태나, 80년대의 운동도 분석해보면 비슷한 분석이 되지 않을까요?
    적극가담자의 지식과 단순가담자의 무의식적 합류가 될터이니까요

  5. 어멍 2009.04.10 11:16 신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역사는 (승자든 패자든) 기록하는 자의 기록이다.
    역사는 역사 자신의 것이다.

    재밌고 유익한 자료와 말씀 감사합니다.

  6. 동대문도서관 2010.07.27 15:54 신고

    안녕하세요- 동대문도서관 입니다.
    『근대의 책 읽기』 저자 천정환 교수님의 강좌 <독자, 그들의 대한민국 - 근현대 문학과 독자의 문화사>가 9월 7일부터 매주 화요일 7시에 동대문도서관에서 열립니다.

    자세한 사항은 아래 링크를 통해 확인해주세요. ^^
    http://blog.daum.net/pangloss/6940293

인터넷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이야기 중에 하나는 독재자 박정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인터넷으로는 일반적으로 그의 철권 독재를 비판하고 특히 일제 시대 만주군관학교 출신이라는 이유로 친일파로 몰아세웁니다.

비판하는 분들의 많은 분들은 박정희 시절을 살아 보지 못한 분들이 대부분이고 그 시절에 반정부 활동을 하던 분들의 글을 그것도 인터넷에서 조각난 글을 읽고 그런 경향을 보이는게 눈에 띄입니다. 그리고 박정희의를 이야기할 때 쉽게 부정하지 못하는 그의 경제발전 성과입니다.

솔직히 그의 경제발전성과 마저도 폠하하려는 글들이 보이지만 역사에서 가정은 의미가 없고 더군다나 그가 그 시기에 국가를 이끈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외국에서 권의주의적인 독제가 초기 경제 발전에 얼마나 효과적인가에 대해서 연구하는 사태까지 만들어낸 장본인이 박정희지요.

사실 우리는 동남아 국가들에서 우리보다 민주화를 먼저 얻었지만 경제가 불안정함으로 정치가 흔들리고 다시 경제가 나빠지는 악순환을 아직도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민주화를 늦게 얻었지만 경제를 얻었고 그를 바탕으로 흔들리지 않는 민주화를 얻었습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진정한 민주화의 바탕은 경제 발전없이 이룰 수 없는 거라고.." 네 배고픈 사람은 도를 논할 수 없습니다.

박정희의 5.16과 친일논란은 다음 기회에 한번 포스팅해보겠습니다.



박정희는 조국근대화에 확고한 철학과 원대한 비전을 바탕으로
시의적절한 제도적 개혁을 단행했다. 매우 창의적이며 능률적이었다." - 카터 에커트 (하버드대학 교수)

"아시아에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위대한 세 지도자로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와 중국의 덩 샤오핑 그리고 한국의 박정희를 꼽고 싶다" "오직 일에만 집중하고 평가는 훗날의 역사에 맡겼던 지도자" - 리콴유 (전 싱가포르 수상/현 싱가포르 고문장관)

"세계 최빈국의 하나였던 한국이 박대통령의 새마을운동을 시작으로 불과 20년 만에 세계적인 무역국가가 되었음을 경이롭게 본다." - 폴 케네디 (예일대학 교수)

"박정희는 한국경제 발전의 유공자" -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박대통령의 역사적 큰 공헌은 그의 뛰어난 지도력 하에 한국을 저개발의 농업국가에서 고도로 성장한 공업국가로 변모시킨 것이다." - 앰스덴 (MIT 정치경제학 교수)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의 목표는 자립경제력을 갖춘 현대국가의 건설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했다." - 맨스로프 (러시아 안보연구소 교수)

"중국의 덩 샤오핑은 세계 유례없는 한국의 연 10% 급성장과 경제부상에 놀라며 박정희식 경제개발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 마홍 (중화인민공화국정책과학연구회장)

"박정희 대통령은 매우 강한 지도자였으며 대기업을 일으켜 국부(國部)를 증진시킨 훌륭한 지도자이다" -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전 총리)

"박정희 근대화 성공으로 중산층 창출이 되고 이것이 한국 민주주의 토대가 되었다. 박정희야 말로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가장 크게 기여하였다." - 2005. 2.4 오버홀트 (美 카터 전 대통령 수석비서관)

"20세기의 위대한 아시아 지도자들 중 20명중에 한명" - 뉴욕타임스

"박정희는 비록 민주화운동을 억압하였으나 역설적으로 민주주의에 필수적인 중산층을 대폭 창출시켜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가장 크게 기여하였다." - 1991.4.2 김상기 (충남대학 교수)

"민주화란 것은 산업화가 끝나야 가능한 것입니다. 자유라는 것은 그 나라의 수준에 맞게 제한되어야 합니다. 이를 가지고 독재라고 매도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2001.6.7 앨빈 토플러 (미래학자/뉴욕대학 명예박사)


"1965년 필리핀의 1인당GNP가 270달러였을 때 한국의 1인당GNP는 102달러 였지만 2005년 필리핀의 1인당 GNP가 1030달러였을 때 한국의 1인당GNP 16500 달러로 변하였다"

"가난한 절대빈곤의 후진국에서 조국보다 잘살던 동남아 나라들을 따돌리고 산업화의 기틀을 마련한 박정희 대통령의 지도력이 존경스럽다" -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


"중국의 덩 샤오핑의 개혁은 박정희 모델 모방" - 美, RAND 연구소

"매 회의마다 우리 농촌과 국토에 가졌던 뜨거운 애정, 빈곤했던
우리 역사에 대한 한에 가까운 처절한 심정, 그리고 빈곤을 극복하여 경제대국을 이룩하려는 치열한 집념에 숙연해지곤 했다"- 고건 (대한민국 전 총리)

"많은 몽골인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리더십과 개발모델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나 또한 그렇다. 한국은 박 전 대통령의 지도 아래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경제개발의 금자탑을 쌓아올렸다" - 잔라빈 차츠랄트 (前 몽골 총리)

“1960년까지도 남한은 성인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79달러로 가나나 수단과 같은 지구상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 그 당시 세계은행 보고서는 버마와 필리핀의 앞날을 장밋빛으로 보았다. 천연자원이 부족하고 에너지원이 없는 남한은 경제적 전망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한은 오늘날 세계 11대 무역국이며 1996년부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이다. (중략) 불리한 자연 공간적 전제에도 불구하고 남한은 경제기적을 이루어 냈다.” 독일 국정 교과서(고교 상급반 지리 92쪽)

“남한은 세계경제로 통합되었다. 대통령 박정희(1961∼79)는 강력한 손으로 남한을 농업 국가에서 산업 능력을 가진 국가를 형성했다. 수도 서울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독일 국정 교과서 (중학교 지리 109쪽)

"박정희 대통령은 나의 롤모델" -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아프리카에서도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해 보는 게 어떨까요." -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신화를 만든 한국경제의 건축가!" - 美, 뉴욕타임스

"어렵던 시절, 한국을 이끌어 고도로 공업화된 민주국가로 변화시킨 역사적 역할을 담당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후임 대통령들이 본보기로 삼을 만한 유산을 남긴 한국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던 지도자들중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


"박정희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한국도 없다. 박정희는 헌신적이었고, 개인적으로 착복하지 않았으며, 열심히 일했다. 그는 국가에 일신을 바친 리더였다" - 2006.11.11 에즈라 보겔 (하버드대학 교수)

  1. 어멍 2009.04.24 17:40 신고

    "박정희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한국은 없다"
    긍정적 의미든 부정적 의미든 이말은 진실에 가깝죠.
    개인적으로는 박정희씨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지만 그가 경제발전으로 근대화에 기여한 것도 사실이고 이로 인하여 아이러니컬하지만 어느정도 안정적 민주주의의 토대를 쌓은 것도 사실이지요.
    고교평준화, 그린벨트, 수도이전 등의 정책은 지금도 의미있고 개인적으로 지지하는 정책입니다.

    아이러니, 새옹지마가 어디 인간사뿐이겠습니까? 한국전쟁만해도 혹자는 전근대의 잔재를 청산한 긍정적의미를 강조하기도 하더군요. 일종의 리셋, 포맷이라고 해야겠죠.

    동영상을 보니 노래실력은 별로인 듯...수줍음도 타고...
    박정희씨 사망 때 어린 마음에 뭣모르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렀던 기억이 새롭네요.

    • 어멍 2009.04.25 11:35 신고

      저보다 연상이신 것 같군요.^^
      한국전쟁 포스팅 기대하겠습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