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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권에서 가장 유명한 스파이는 007 제임스 본드다. 그러나 제임스 본드는 실존 인물이 아니고 영국의 유능한 정보원을 토대로 만든 영화 속 인물이다. 사회주의권에서 가장 유명한 정보원은 구 소련의 리하르트 조르게다.

정보원은 죽어서도 이름을 남기지 말아야 하는데, 조르게는 조국 소련을 구했다는 이유로 모스크바에 동상까지 세워졌다. 그리고 그가 ‘결정타’를 먹인 일본에서는 2003년 ‘스파이 조르게’라는 영화가 만들어지고 NHK가 특집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방영했다.

조르게는 1895년, 지금은 소련에서 독립한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독일인, 어머니는 러시아인이었다. 그는 네 살 때 부모를 따라 독일로 건너가 살다가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3번이나 부상하고 의병제대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독일에서는 공산주의가 팽창했는데 공산주의 운동을 억누르기 위해 우파 독재로 등장한 것이 바로 히틀러의 나치당이다.

독일 청년 조르게는 공산주의를 선택했다. 1926년 그는 모스크바에서 국제공산당 중앙위원이 되고 이후 신분을 감춘 채 공산주의를 위한 첩보원으로 독일과 영국 프랑스 등을 돌아다녔다. 아버지의 조국을 버리고 어머니의 조국이자 사상의 조국인 소련을 위해 일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1930년 그는 기자 신분을 가진 일본인 공산주의자 오자키 호스미를 만나는데, 이듬해 그로부터 일본이 만주를 지배하기 위해 만주사변을 일으킬 것이라는 중요한 첩보를 얻었다. 1933년 오자키는 일본으로 돌아가 총리실에서 촉탁으로 근무하게 됐다.

1938년 히틀러는 오스트리아를 무혈 합병하고 이어 체코를 협박해 게르만인이 많이 사는 체코의 주테덴 지방도 무혈 합병했다. 이렇게 되자 영국과 프랑스는 물론이고 공산종주국을 자부하던 소련이 독일의 행보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1939년 히틀러는 그를 두려워하는 소련을 상대로 ‘두 나라는 싸우지 말자’는 독소(獨蘇)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공작원 조르게

그러고는 바로 폴란드를 침공했는데 이때 소련도 함께 침공해 양국은 폴란드를 나눠 가졌다. 폴란드는 영국 프랑스와 방위조약을 맺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자, 히틀러는 재빨리 기갑부대를 투입하는 전격전을 펼쳐 개전 보름만에 파리를 함락하는 쾌거를 올렸다.

히틀러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였기에 전세계에 반공을 확산하고자 했다. 1937년 독일은 공산주의 운동으로 골머리를 앓던 이탈리아, 일본과 ‘방공(防共)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1940년 이 동맹을 군사동맹으로 발전시켰다. 반공을 모토로 내건 히틀러가 주변국을 침략해 전세계가 전쟁 분위기로 치닫던 시기, 조르게는 공산주의자라는 신분을 감추고 독일의 언론사에 들어갔다.

조르게는 일본어 등 5개국어에 능통했다. 1938년 그는 독일 언론사의 합동 특파원 자격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옛 전우 오자키를 만났다. 전운은 동북아에서도 감돌았다. 독일의 동맹국인 일본은 1937년부터 중국을 공격하고 있었다(중일전쟁). 일본은 자국이 필요로 하는 자원 조달을 방해하는 미국 영국 네덜란드에 대해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1941년 4월13일 일본은 소련과 ‘서로 싸우지 않는다’는 중립조약을 맺었다. 일본은 소련과는 싸우지 않고 중국과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이 장악하고 있는 동남아 쪽으로 전선을 확대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소련 처지에서 본 일본은 반공주의가 매우 강하고 1905년 러일전쟁에서 패배를 안겨준 대적(大敵)이었다. 중립조약을 맺었다고 하지만 일본에 대해서는 한 치도 방심할 수 없었다.

이러한 때 국제공산당 비밀 간부인 조르게는 오자키를 통해 일본이 소련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첩보를 빼내 이를 타전했다. 그러나 소련은 조르게가 보내온 정보를 신뢰하지 않았다. 일본은 독일의 동맹국이었으므로 독일 정보가 많았다. 조르게는 독일이 독소불가침 조약을 무시하고 1941년 6월20일 소련을 공격하기로 했다는 정보도 타전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 정보도 무시했다.

독일은 날씨 때문에 이보다 이틀 늦은 6월22일 소련을 공격했다. 이때부터 소련은 조르게의 보고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신뢰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조르게의 보고가 있었던 덕택에 소련은 독일군의 공격에 무방비로 당하지는 않았다. 독일의 공격을 막아내느라 정신이 없는 소련은 조르게의 보고처럼 일본이 동쪽에서 소련을 공격하지 않길 바랐다. 이때 조르게를 ‘일본은 소련이 아니라 미국을 공격할 것 같다’는 첩보를 보냈다.

조르게의 보고가 맞기를 노심초사하며 기다렸는데 1941년 10월18일 조르게가 일본 공안에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 공안은 국가 기밀이 새는 것을 알고 방첩활동을 강화하다 조르게에 주목했다. 일본 공안기관이 감시에 들어가자 조르게도 위험이 다가오고 있음을 인식했다.

그는 중국을 거쳐 소련으로 도주할 생각도 했으나 아주 사소한 일 때문에 행동에 옮기지 않았다. 혼자 살던 그는 일본 무희(舞姬)와 사랑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밤 그는 무희를 만나러 가려다 한 협조자로부터 “감시자가 가까이에 있다. 도피하라”는 쪽지를 건네받았다. 그는 이 쪽지를 소각했어야 한다. 그러나 애인을 만나야 한다는 마음에 그냥 감으로써 일본 공안은 이 쪽지를 입수했다. 그리고 그를 체포해 이 쪽지를 근거로 취조함으로써 그간 벌인 스파이 활동이 드러나게 되었다.

조르게를 체포한 일본은 계획대로 1941년 12월7일 미국함대가 있는 하와이와 미국의 식민지인 필리핀, 그리고 영국의 식민지인 말레이시아와 프랑스 식민지인 베트남, 네덜란드 식민지인 인도네시아를 동시에 공격했다. 이때부터 소련은 조르게의 보고가 확실하다고 보고 일본의 공격에 대비해 동부에 배치한 군대를 서쪽으로 옮겼다. 그리고 1942년 여름 시작돼 그해 겨울을 넘겨 끝난 스탈린그라드(지금은 볼고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전세(戰勢)를 바꾸다

그리고 이어진 쿠르스크 전차전(1943년 2월)에서 독일 전차군단을 괴멸시킴으로써 결정적 승기를 잡았다. 미국과 영국군이 주도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소련군이 쿠르스크 전투에서 승리해 독일군을 구축(驅逐)하기 시작한 1년4개월 이후 펼쳐진 것이다. 비슷한 시기 미국과 맞붙은 일본도 열세에 몰렸는데 이때 조르게는 간첩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1944년 일본과 소련은 간첩을 맞교환하자는 논의를 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를 거부했다. 맞교환으로 조르게가 돌아오면 조르게의 보고를 믿지 않음으로써 독일 침공을 허용한 자신의 실수가 드러날까 두려워한 것이다. 맞교환 논의가 중단되자 일본은 조르게와 오자키 등을 처형했다.

그러부터 25년이 흘러 스탈린마저 사라지자 소련은 조르게를 ‘전쟁의 향방을 바꾼 인물’로 평가해 영웅칭호를 내리고 그의 동상을 모스크바에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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