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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풍물지》를 쓴 조지 길모어는 "한 영국인은 조선에서는 가장 깨끗하다는 사람이 그가 본 가장 더러운 사람이었다"고 함

프랑스 외교관이었던 프랑뎅은  '거리의 불결함은 고질적인 것으로 전염병이 당장이라도 발생할 것 같은 환경’

“한 나라의 도시인 큰 도시(서울)치고 그 조악함이란 이루 묘사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25만으로 추정되는 시민들이 땅에서 살고 있는데... 군데군데 뚫린 고약한 구멍과 미끌거리는 시궁창으로 인해 더욱 좁아진 그런 골목을 끼고 살고 있고, 이 시궁창들은 집들에서 버려진 고체, 액체의 오물을 운반하는데 그 더럽고 썩은 시궁창이 새까맣게 땟국이 흐르는 반라의 어린이들과 개들이 즐겨 노는 곳이고...
행상인들은 판자조각을 시궁창에 걸쳐 놓고 그들의 상품을 판다... 마당은 반쯤은 두엄더미이고 반쯤은 돼지우리인데 거기 바로 우물이 있어서 여자들이 태연하게 그 우물에서 음료수를 길었다... 그 밖에는 수렁이 있어서 밤새도록 역겨운 냄새를 풍겼고... 여름에는 악취가 무지무지했고 먼지는 숨 막힐 정도였는데 비참해 보이는 개들의 숫자와 피가 뚝뚝 흐르는 고기가 햇볕에 검게 변해가고 있는 모습은 구토증을 일으키게 했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1897)>

한국인들 집안에는 위생 시설이 어떠한가에 관해서는 아무 말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아주 초보적인 위생 상식도 배우지 못했으니 말이다. 아무리 부잣집에 가도 상황은 별 다를 바가 없었고, 오물을 치우는 청소부가 있었지만, 그 청소부가 치우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먼저 오물을 피해가는 것이 더 현명했다.
우물도 매우 오염되있었다. 오물이나, 빨래를 했던 물, 이런 저런 잡다한 더러운 물질들이 우물에 버려졌고, 그 결과로 어느 한 마을에 콜레라가 번지면 그 이유는 매우 뻔했다.
<대한제국 멸망사-헐버트>

위의 인용문들은 서구인들 시각으로 바라본 19세기 조선 풍물에 관한 내용 중 일부를 발취한 것들이다. 흔히 조선시대의 위생상태에 대해서 인터넷에서 이야기할 때 쓰이고는 하는 내용들로 그들의 주관적 감상을 적은 내용임으로 크게 흠잡을 내용은 없는 것 같다. (사실 저자 대부분이 조선에 대한 애정을 깊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책의 극히 일부를 인용하는 것 차제가 내용의 외곡이기도 하다. 예로 말이에 이사벨라의 다른 이용문을 보면 느낌이 좀 다를 것이다.)

하지만 인터넷을 사용하는 요즘 사람들 입장에서는 저 시대의 생활을 모르고 저 내용을 글자 그대로 저들의 시각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아서 나름 대로의 해석을 한번 해본다.

일단은 19세기에 좀 정비되기 시작한 도시생활을 하던 그들 눈에는 꽤나 비위생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아래 사진을 보면 이해는 간다. 초가집에 대해서 환상을 이야기하는 꼴을 종종 보지만 지붕은 볓집이기 때문에 자연히 썩기 마련이고 궁뱅이 같은 벌래부터 참새 심지어는 구렁이까지도 사는 환경이다.

또한 그 좋다는 흙벽은 튼튼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계속 보수를 해줘야고 조금만 소흘해도 벽속의 나무 골조가 다 들어나는 흉물스러운 모습이 되기 십상이다.

적어도 하수도 시설이 없던 한양이 시궁창이 곳곳에 있는건 당연한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유럽도 하수도 시설을 완비한 것은 저 때 기준에서 그리 오래전이 아니었다. 더욱이 그들이 위생이라는 개념을 이해한 것도 그다지 오래되지 안은 상황에서 조선의 위생 관념을 평하는 모습은 철없는 잘난척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유럽이 19세기 초까지도 2층 건물에서 배설물이 들어있는 요강의 내용물을 길에 버리는 풍습이나. 거리에 배설물을 피하기 위해서 굽이 높은 신발을 신었다는 이야기를 보면 그들 도시의 생활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당시에 저들이 이해 못했던 상황을 지금은 인터넷을 사용하는 후손들이 그대로 답습하는 꼴인데. 일단 푸세식화장실의 존재와 두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주 유명한 속담이 하나 있다. '사춘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지금 이 뜻이 와전되어서 시기심을 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분뇨가 가장 중요하고 유일 무이한 비료인 관계로 사춘 땅에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어진다는 뜻이다. 그 만큼 배설물은 땅(농지)에 중요한 요소였다는 것이다.

화학비료가 없던 시절에는 저 분뇨 두엄은 무척이나 중요한 자원이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서 화장실이 급해도 남에 집 화장실이 아니고 자기 집 화장실까지 참고 와서 볼일을 해결하곤 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일부 사람들이 그토록 좋아하고 사랑하는 유기농이 바로 이 것이다.

과거 회충을 모두 품고 살 수 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고 말이다. 요즘은 무기농이 대세라서 회충을 가진 사람이 별로 없지만 말이다.

아마 저 글을 쓴 외국인들은 시골 경험이 없는 사람이기 십상이다. 저 사람들은 조선이 아니고 자국의 시골만 가도 저런 글을 썻을게 틀림없기 때문이다.

어릴적 추억으로는 어떤 냄새였을지 상상은 간다. 지금도 농지 옆을 지나면서 두엄 냄새에 기겁들을 하는데 거기에다 각종 음식 냄새 등 환기 안되는 듯한 다양한 냄새들의 향연이었을 태니 저들이 저런 글을 남기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읽는 우리는 저 글을 좀더 이해하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저런 모습이 그리 오래전이 아니고 부모님 세대라면 익히 알고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약간 일직 위생환경이 변했다고 저런 글을 쓰는 것은 우수운 일이다.

또한 아직 도시환경이 정비되지 못한 국가를 여행하면서 그 지역 문화를 이해 못하고 비웃는 모습은 스스로의 무지와 몰상식을 자랑하는 꼴 밖에 안된다는 것이다.

참고로
* 조지 길모어는 1880년대에 조선을 방문한 미국인 선교사이다.

* 이폴리트 프랑댕(Hippolyte Frandin)은 2대 프랑스 공사이다. 전임 대리공사가 리심이라는 궁중 무희와 사랑에 빠져 떠남에 따라서 5년간 공사직을 역임한다.

* H.B 할버트 - 한국명: 紇法, 轄甫. 1863년 태어나 1949년 생을 마감했다.
미국의 버몬트(Vermont)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1884년, 다트마우드(Dartmouth) 대학에서 히브리어를 수학한 다음 유니온(Union)신학교에 입학했다. 1886년 7월, 고종의 뜻에 따라 설립한 육영공원(育英公院)의 교사로 초빙되어 내한
1891년 12월, 육영공원의 교사직을 사임하고 귀국했다. 1893년 9월, 재차 입국하여 {코리아 리뷰}(The Korea Review)의 편집을 주관했다.

1905년 10월-11월,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미국의 정부 요인들과 접촉하면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정책에 미국이 개입하여 줄 것을 요청했다. 1907년 7월, 헤이그(The Hague) 만국평화회의에 이준(李儁), 이위종(李瑋鍾), 이상설(李相卨)과 함께 참석하고 한국으로의 입국이 거부되어 미국으로 돌아갔다. 1949년 7월 이승만 박사의 초청으로 내한, 1주일만에 여독으로 별세하여 마포 양화진(楊花津)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1950년 건국공로훈장 추서(독립장).


*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1832년 영국 요크샤州 보로브릿지 홀에서 출생한 여성이다. 23세 때부터 작가이자 지리학자로 활동했다. 1904년에 사망할 때까지 세계 곳곳을 다니며 조사하고 연구했다. (개인적으로는 여자 인디아나 존스쯤 될거 같다.)

  서울의 성벽 안쪽을 묘사하는 일은 어쩐지 피하고 싶다. 나는 베이징을 보기 전까지는 서울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도시가 아닐까 생각했고, 사오싱의 냄새를 맡기 전까지는 서울이 세상에서 가장 냄새나는 도시가 아닐까 생각했다. 거대 도시이자 수도로서 서울의 위엄을 생각할 때 그 불결함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 1894년)

  1. 어멍 2009.07.15 09:41 신고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의 해석은 처음 접하네요.
    가치관과 문화의 편견과 오해는 늘상 빠지기 쉬운 함정이지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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